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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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리고 부모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간다. 외모는 점점 부모를 닮아가더라도,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한 소녀가 유괴당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열 다섯 살 자신의 아들일 때,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토머스 H. 쿡은 아버지가 경찰의 수사망과 마을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에 맞서 아들의 무죄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이야기를 넘어서, 보여지는 정황 증거들로 인해 가족들조차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작년에 출간되었던 윌리엄 랜데이의 <제이컵을 위하여>에서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리가 없으니 부모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무죄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 증거들은 모두 아들이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면, 그래도 계속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두 작품의 설정은 유사하지만 감정과 관계에 치중하는 방식이므로, 윌리엄 랜데이의 서사로 풀어나가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윌리엄 랜데이는 지방검사 출신인 이력대로, 작품 속 공판 과정을 실제 법정을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 있게 그려낸다.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리얼하고, 세세하게 재판 과정을 보여 줌으로서, 피고 측과 원고 측이 어떤 입장으로, 어떻게 재판에 임하는지를 보여준다. 법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디테일로 탄탄하게 플롯을 구축하고, 사실에 입각한 현실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토머스 H. 쿡의 <붉은 낙엽>은 사건의 전개 과정보다는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와 미묘한 심리에 더욱 주목한다. 그러니까 단어 자체보다는 행간으로,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만들어내는 분위기에서 보여지는 침묵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할까. 그의 작품은 물위로 돌을 던져 잔잔히 파동이 이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궁금증이 서서히 증폭되면서, 사건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서정적인 묘사와 의미를 단번에 체감할 수 있는 적확한 표현들은 잔잔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그 어떤 파도보다 더한 감정의 물결을 선사한다. 그래서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독자들은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 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 단란한 가족 사진을 하나 떠올려보자. 평범한 어느 집에나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가족 사진 말이다. 사진이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기 위한 장치이다. 영원히 간직할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 우리는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체크하고, 밝게 웃는 표정을 짓는다.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십 여년 전에 찍은 가족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는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도 계시고, 지금보다 많이 정정해 보이는 부모님의 모습도, 훨씬 어려 보이는 파릇파릇한 나와 동생의 모습도 있다.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짓고 있는 미소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물론 나도 생각한다. 행복이란 그렇게 순간의 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현재 불행하다고 해서 그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닐 텐데 굳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도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에릭은 아버지의 파산과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가족이 지탱해온 안정된 행복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무렵에 찍은 가족 사진 속 그들의 미소는 거짓이 되는 것이다. <행복의 불빛 바로 너머에 사나운 짐승들이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는 그의 생각은 고스란히 그의 아내와 하나뿐인 아들로 이루어진 두 번째 가족에게도 이어진다. 비극은 그렇게 소리 없이, 스며드는 것이다.

한적한 마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 대학 강사인 메러디스의 중학생 외아들 키이스, 이들 가족의 삶은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녀 에이미가 실종된다. 하필 그녀를 제일 마지막으로 만난 게 키이스였고, 결국 그가 유괴 용의자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기 시작된다. 아르바이트로 베이비시터 일을 하는 키이스는 사건이 벌어진 날 밤 에이미의 집에 갔었고, 그날 저녁 이후 에이미가 사라진 것이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은 키이스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진다. 아버지인 에릭은 아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추호도 아들을 의심하지 않는 아버지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지만, 사건 당일 밤 아들의 불확실한 행적에 조금씩 의심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에 대해 나만큼 아는 이는 신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고 싶었으나, 실상 그러지 못하는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 것도 거칠게 없다고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이 창조한 불가사의한 존재인 아이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모의 외모를 닮고, 말투와 습관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만들어지는 자아와 내면은 고스란히 환경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이 커가는 것을 볼 때 부모들은 매 순간 놀란다. 분명히 나와 점점 닮아가는 내 아이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 자신이기도 하고,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 부모의 입장에 서보지 못한 나조차도 에릭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 오해와 의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심은 산()이다. 그게 내가 아는 한 가지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사소하게 시작된 의심과 상황이 만들어내는 오해로 인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가족을 그려내는 토머스 H. 쿡의 유려한 문장들은 처연하고 슬프다. 소재와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것들로 문장과 단락을 만들어서 빚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더 매혹적이라는 말이다. 분명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있고,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극적인 긴장감이 충분히 조성이 되는데,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독자들은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그들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캐릭터의 내면적인 부분에 대한 탁월한 묘사는 감정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사실 의심이란 씨앗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절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 사실을 알았던 순간으로부터 되돌아갈 수가 없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 순간이다. 화해를 하고 그 순간을 모면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시작된 그 씨앗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의심이 시작되면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심을 산()으로 비유한 것처럼, 그것은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들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메러디스는 점점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워져 가고, 키이스는 더욱 반항적이 되어 간다. 실종, 유괴에 대한 유죄판결 유무보다는 키이스가 의심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들 가족을 변화시키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키이스가 에이미를 죽였을 거라는 의심에서 비롯된 마음의 오염은 씻겨질 수가 없으니까. 서두에 언급했던 윌리엄 랜데이의 <제이컵을 위하여>에서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혐의를 벗는다고 해도,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비난을 결코 피할 수는 없다. 자신의 아들이 '무죄'라고 결국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무고하다'는 얘기는 아니 말이다. 부모라면 자식의 결백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증거도 없는데 범인으로 의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라면 자녀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가능성에 대해 진위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우선 부정할 방법부터 찾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의 결말은 실제 밝혀진 범인과 사건의 해결에 대해 독자들에게 제대로 한 방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거기까지 이르는 그 과정이 나는 참 슬프고, 무서웠다. 이런 일은 사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 벌어진 사실보다는 그 진실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해석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가족이란 사랑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공동체이고, 그 사랑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믿음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논리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신뢰하는 그것. 믿음에는 그렇게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진실은 바로 '무조건'이라는 건데, 사실 어디 우리 삶이 그렇게 되던가 말이다. 누구나 가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하다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 설사 그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더라도, 진실한 믿음은 결국 상대방에게 전해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존재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숨쉬고 있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느끼지 못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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