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저어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후샤오밍이 그런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국가 안전부 대 외국의 일본 담당 부서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거물 침저어(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는 어류)가 일본에 잠복해 있다."

침저어. 즉 슬리퍼(Sleeper)는 본국으로부터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대상국의 한 시민으로 살며 오로지 명령을 받았을 때만 활동을 시작하는 공작원을 말한다. 게다가 후샤오밍이 들었다는 그 침저어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외무성에서 두견새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정보 제공자로부터 국내에 침저어 맥베스라 불리는 스파이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걸 밝히기 위해 경시청 내에 팀이 꾸려진다. 유출된 기밀문서는 미국과 일본의 합동위원회가 정한 '요코타 페이퍼'라는 문건으로 타이완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를 상정한 공동작전 계획이다. 이 요코타 페이퍼를 도쿄에 있는 침저어 맥베스가 중국에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베이징에 있는 두견새도 결국 고국의 배신자이므로, 일본과 중국의 배신자 두 명에 의해 기밀문서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이 내용을 처음 알려준 후샤오밍 또한 사기꾼 망명자인지 정확하지가 않고, 맥베스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부족한 상황이다.

과묵하고 무뚝뚝한 후와와 그의 파트너인 와카바야시, 맥베스로 의심되는 아쿠타가와 의원의 비서인 이토 마리는 후와와 동창이다. 경시청 외사2과 형사들 내에서도 소리마치와의 껄끄러운 관계와 새로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외부에서 영입된 도쓰이 미사키.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이야기는 그렇게 휘몰아쳐간다. 때로는 가정을 배제시키고, 때로는 동료까지 의심하며 조용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적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와, 옳고 그름이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업무적인 특수성이 이야기의 속도감을 올려준다. 극중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제거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협잡들이다. 페이지수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기도 하지만, 원가 내용 자체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처음부터 빠른 전개가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상황과 맞물려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준다.

 

와카바야시는 매우 띠어난 수사관이다. 특히 용의자 사진 가운데 범인을 골라내는 일은 그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 어떤 일로 조사한 남자인지, 어디의 누구와 연결되는 여자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얼굴 사진이 저장된 메모리와 그걸 순식간에 찾아내 해석하는 CPU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런 두뇌도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주 멈춰버리고 만다.

일본과 중국, 미국 간의 정보 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작품은 첩보, 경찰 미스터리물이다. 첩보 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경찰 미스터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떠오르기도 한다. 첩보물로서의 무게 감과 경찰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정보와 치밀한 구성, 탄탄한 문장들에 비해서는 어딘지 허술하고, 존 르 카레의 작품에서 빠른 전개와 극적인 긴장감 너머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에 비해서는 무언가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기존에 소네 게이스케의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러 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첩보물의 가장 큰 특징이 복잡한 플롯인데, 이리 저리 얽힌 관계와 끊임없이 터지는 의외의 전개와 막판의 반전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외사2과에서는 중국이나 북한의 정보 조직 및 관련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협력자를 스파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호칭으로 S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경찰 조직에 공인하는 협력자인 셈인데, S라는 존재를 통해 생겨나는 갈등도 사건을 증폭시키는데 도화선의 역할을 한다. 조직 내에서 스파이로 의심받는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묘사와 그로 인한 갈등과 인물의 고뇌, 그리고 계속 벌어지는 진실과 거짓의 뒤집기와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작품이 총격전이 난무하는 유혈 스릴러 극보다 더한 서늘함을 심어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양심과 윤리성을 가슴에 묻어둔 채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고뇌해야 하는 캐릭터라 어느 정도는 일반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 않나. 기존에 영미권 작가들의 첩보 소설만 읽어서인지 일본 작가의 첩보전은 매우 색다르고, 독특한 재미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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