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라는 제목과 구스타프 클림프의 그림을 표지로 한 탓에 나는 이 책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저서들이 그 유명세를 증명하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짚어보자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마지막으로 사망한 걸로 정리가 된다. 저자인 고체 스밀레프스키는
바로 그 즈음 그가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 누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남겨진 누이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당시에
프로이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지 않게 누이들의 출국비자를 마련해서 그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누구도 알아낼 수 없는 프로이트의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누이들의 생이었다.
누이들 중에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었던 아돌피나, 어머니에게 학대 받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평생 외롭게 살았던 그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의 생애 속에 감춰진 주변 인물을 그려내는 작업이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품은 커다란 역사 속의 한 귀퉁이에서 그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오롯이 그려낸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프
<죽음과 삶>
오빠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 벽에 걸려있는 70년 전 우리 프로이트
집안의 자식들을 그린 유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이 그려진 당시 한 살 반이던 알렉산더가 훗날 기억하기로, 그가 조금 컸을 때 지그문트 오빠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누이들하고 같이 있으니까 꼭 한 권의 책 같구나. 네가 막내고 내가 장남이니까. 우리가 튼튼한 표지가 되어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너보다 앞서 태어난 누이들을 굳건히 보호해줘야 해. "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오빠가 다시 그 그림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건 따로 싸자꾸나."
오빠는 손을 뻗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려 했다.
"오빠는 그 그림에 손댈 자격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을 가면서, 그는 올케, 조카들, 집안 식솔들, 올케네
여동생과 가정부 둘, 그의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들까지.. 강아지
요피 까지 데려갔다. 그러나 누이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남겨진
그의 누이들은 오빠가 런던에 가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비엔나에서 빼내 줄 거라고,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궁핍과 공포에 떨면서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가 왜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추해볼 수 있는 건, 프로이트가 평생 인간의 본질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고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아버지라는 적의 죽음을 갈망했기 때문이다>라는
지그문트의 말처럼,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력한 존재가 원초적인 죄를 저질렀다는 이론에 따르자면 뭐.. 설명이 안 될 법도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이니 우리는 이 작품의 내용에 주목 해야 한다.
아돌피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많이 아팠고, 여섯 살 위였던 프로이트는
다른 누이들보다 그녀에게 더 살갑게 대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도서관에 들락거렸었고, 어린 그녀는 그런 시간들
덕분에 엄마의 힐난과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었다. 어린 아돌피나가 기침을 하거나 토하거나 열에 들떠 정신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엄마의 푸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은 그녀에게 상처로 박힌다. 물론 그녀 또한 엄마가 자신을 얼만큼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했고, 그 고통은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어린 그녀에게 사랑 만큼의 미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아돌피나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 사랑했던 라이너의 배신과 그의 자살로 인한 충격, 이어지는 낙태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 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장마다 삽입되어 있는 뒤러의 판화<멜랑콜리아>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뒤러의 판화 속 멜랑콜리아에는 날개가 있지만
그녀가 날개를 펼치고 날 거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아돌피나가 사랑하던 라이너와 헤어지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복잡한 애증관계에 있던 엄마와 지내던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결혼한
뒤 신혼 집에 의원을 열고 정신과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진료를 했다. 외로웠던 그녀는 오빠네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애원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식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돈도 부족하고 공간도 넉넉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아돌피나는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매일을 한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그녀의 일부는 침대에 그냥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으로 말이다. 그때, 그녀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를 본다. 자신의 몰골을 마주하기 싫어서 일부러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판화 속의 여인은 날개는 있지만 천사는 아니고, 아무데도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돌피나 역시 망연자실한 상태로
몇 해를 보냈으니, 곁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상태에서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으리라.
지그문트 오빠가 집에서 나가 병원에서 살기 시작하고, 안나 언니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파울리나와 마리 언니도 결혼해서 베를린으로 떠나고, 부모님만 남은 집에 아돌피나는 홀로 쓸쓸히 남아 있었다. 집안 어디에서도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결핍, 공허, 무력감과
우을증.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존재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표지에 삽입된 클림프의 <죽음과 삶>과
뒤러의 <멜랑콜리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의 양면과도 같이 사실은 별 다를 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돌피나는 결국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것이라 되뇌 인다. 엄마도, 아기도, 오빠도..이 모든 고통도.. 상처받기 쉬운 자신도...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살면서 가장 고통 덜 받는 곳으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어쩐지 웃을 수 없는 농담처럼 느껴지는 슬픈 장면이었다. 나는 이 매혹적인 책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히려 더 관심이 갔다. 정작 이 작품에서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그의 누이 아돌피나의
목소리만 들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어쩐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게 여운이 많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