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훤칠하고 능력 있고 매력적인, 게다가 돈까지 많은 젊은 남자가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그 남자와 같은 동네에 살지만 여태 단 한번도 스쳐 지나가본 적 없을 만큼 다른 환경에서 자란 여자는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남자의 간병인으로 여자가 일자리를 구하고, 집안 형편 상 돈을 벌어야 하는 씩씩하고 활발한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고 비협조적인 그를 참고 어떻게든 돌봐야 한다. 딱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들어도 이후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 어딘지 뻔하다. 사지마비환자와 간병인이라는 설정에 심지어 엄청난 부자 남자와 평범한 집안의 젊은 여자가 만났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두 주인공이 투닥 거리면서 앞으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결국 끝이 어떻게 될지 너무도 상투적으로 보여,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감동할 준비부터 하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스토리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의 휴먼 멜로 드라마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할 것 같았던 이 작품은 놀...도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최루성 멜로나 역경을 극복하는 휴먼 스토리의 감동 대신에 이 작품은 지나치게 담백하고, 때로는 유쾌하고, 잔잔하게 따뜻하며, 목이 메이는 슬픔으로 페이지를 채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전신마비환자가 등장한다는 전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통적인 스토리 상의 관습을 피해가며 아예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스물여섯의 루이자는 6년 동안 일했던 카페가 문을 닫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그녀의 엄마는 할아버지를 돌보느라 일을 할 수가 없고, 가구공장에 다니는 아빠는 항상 잘릴 까봐 전전긍긍하시는 처지다. 꽃가게에서 일하는 동생 카트리나의 수입은 시원치 않고, 어릴 때부터 공부잘하고 똑똑했던 그녀는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집안의 빚은 쌓이고, 신용카드 돌려 막기는 예사인 집안 형편 때문에라도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실업수당 신청을 하고 여기저기 면접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다, 어느 날 사지마비환자의 식사와 활동을 돌보는 간병인 일을 시작하게 된다. 늘 동네에서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했던 성에 사는 젊은 남자 윌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그의 엄마인 트레이너 부인이 법조인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대신 윌을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문적으로 의료에 관련된 부분은 네이선이라고 간병인이 따로 있고, 그가 오전에 돌아가면 그 이후의 시간 동안 윌을 돌보는 것이 그녀가 맡은 일이다. 이 작품이 전형적인 휴먼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까칠하고 삶에 의욕이 없는 전신마비환자와 생에 대한 의욕이 마구 넘쳐 흐르는 여자 간병인의 만남이라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루이자에겐 오래 사귄 남자친구 패트릭이 이미 있고 윌에게도 미모의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저는 35 C5/6 사지마비환자의 친구/간병인입니다. 예전에 굉장히 성공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라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사실 나는 그가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그가 즐길 수 있는 활동이라든가, 그가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굉장히 성공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로 인해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사지마비환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평범한 우리는 아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극도로 제한된 육체적 자유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이건 정말이지 숨은 쉬고 있으니 살아 있는 거지만, 죽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인 것이다. 이 작품은 굉장히 영리하게 윌이 사고가 나는 순간에서 시작해서, 바로 2년 뒤의 시간으로 건너뛴다. 그러니까 돈 많은 그의 가족이 해볼 수 있는 건 모두 해 본 상태, 갑자기 줄기세포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가 나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윌이 휠체어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린 상태에서 두 주인공을 만나게 한다. 당연히 서로에게 좋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처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조금씩 가까워진다. 겨우 여기까지가 작품의 30프로 정도 지점이다. 여기서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안락사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낸다. 나는 트레이너 부인이 <처음부터 아들의 죽음에 공범이 될 생각은 아니었다> 라고 시작하는 장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회복될 가망은 전혀 없으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니까, 이 상황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삶을 끝낼 수 있게 해달라는 윌의 제안을 처음에는 당연히 그녀도 거절했다. 하지만 수 차례에 걸친 자살 기도를 통해서 결국 윌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동의를 얻어냈다. 어차피 그녀가 거절해도 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할 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합법적으로 죽기 위해 병원에 가기 전까지의 6개월 동안의 유예 기간이 루이자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던 것이다. 6개월의 말미 동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서 아들이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인 것이다. 신문과 TV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소위 '죽을 권리'로 도배된다.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는 어떤 여자는 고통이 너무 심해질 경우 남편이 자기와 함께 디그니타스 병원을 찾더라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명시해달라고 청원을 내고, 부상으로 영구적 장애를 얻게 된 어느 젊은 축구 선수는 부모님께 디그니타스로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스위스의 모처에서 숨을 거둔다. 루이자는 뉴스를 보며 생명옹호자 측의 주장을 경청해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왜 '죽을 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만,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스토리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더 구체적으로 적을 순 없지만, 한가지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는 거다. 그 흔한 신파나 눈물 한 자락 없이, 현실을 직설적으로 반영해서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여느 휴먼드라마의 패턴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물론 감동과 재미는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보너스이다. 원래 나는 휴먼 스토리나 신파 멜로를 싫어 하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울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 편이다. 올해 나를 울린 작품이 딱 두 권인데, 하나는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다. 어떤 제목으로 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절대 놓쳐서는 안될 작품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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