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김정남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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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방송에서, 책에서 힐링(healing)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몸과 마음의 치유가 힐링이므로 그만큼 현대인의 삶에서 '위로'가 필요하다는 얘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는 신나는 걸 그룹 노래에서도, 한바탕 울 수 있는 멜로 영화에서도, 때로는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찾을 수 있다. '힘들 땐 잠시 쉬어 가도 돼'라고 속삭이는 책 한 권이 상처를 보듬어주기도 하고,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상처 받은 자신을 토닥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에 시작된 힐링 열풍은 올해 '순례' 열풍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례'란 보통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기 위해서 순례를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16년만에 헤어졌던 네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레이첼 조이스의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에서는 20년 전 회사 동료의 편지 한 통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에선 주인공 리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속죄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모두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가정해보자. 누가 가장 그리운가, 송희? 누나? 죽은 아내? 아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인간적인 그리움 따위는 이제 겨우 지워졌다. 이렇게 오로지 나 스스로가 되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저기 서 있는 아이가 내 분신이라면, 그 또한 나일 것이고, 우리가 함께 죽는다면 세상은 나를 비정한 아버지라고 욕할지는 몰라도, 나 스스로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겠다. 내가 없으면 저 아이도 없다.

김정남의 <여행의 기술>에선 아들과 함께 죽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생활고에 지친 아내가 집을 나간 지 2년이 되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자폐아이고, 겨우 연봉 이천 사백 만원 받는 교수직 조차 해임될 위기에 처한 그는 7번 국도를 통해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물론 이 작품은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끝내려고 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나 레이첼 조이스의 작품에서와 같은 긍정적인 분위기보다는,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고단한 삶을 끝내려는 비극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다. 사는 게 왜 이리 퍽퍽하고, 지치는 건지 세상의 온갖 불행을 끌어안고 있는 듯한 인물에 쉽사리 공감하기는 어렵다. 실제 우리네 일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그렇지 않나. 끔찍한 현실을 마주보는 것보다는, 잠시 눈 감고 달콤한 미래를 상상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에서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긍정적인 내용만 읽더라도 삶이 달라지진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굳이 지루하고, 우울한 일상을 공유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작고, 얇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초반 십여 페이지를 읽다가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책을 다시 펼치게 된 것은 어느 리뷰를 보고 나서이다. 사실 초반 몇 페이지만으로 책의 전체 내용을 판단하면 안 되는 거니까 말이다.

주인공 승호가 처한 인생은 글로 읽기만 해도 참 갑갑하다. 대체 생의 어느 순간에 제대로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불행으로 점철된 삶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다 내연 녀의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 하나 밖에 안 남은 가족인 누나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구박받고, 남편이 휴거론에 취해 행방불명이 되는 등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승호 역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지만 갑자기 어둑한 생활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 부부의 아이에게 자폐적 소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일곱 살 무렵이었다. 그 뒤로 아이는 유치원을 그만두었고, 대신 소아정신과와 언어 클리닉, 스피치 학원, 수영장을 순례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언제나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이 무시로 튀어나왔다. 너를 만나서 내 인생을 망쳤다는 말도 어김없이 따라왔다>는 대목처럼 그의 아내가 절벽 끝에 몰려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무늬만 교수라는 자괴감에 빠져 강의를 다니는 승호는 세금을 떼고 겨우 백 칠십여 만원밖에 벌어오지 못했고, 아이 때문에 병원과 각종 치료 시설에 매달 내야 하는 만만치 않은 비용들은 모두 다섯 개의 카드를 돌려가며 막아야 했다. 카드 연체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사천만 원의 연체 금이 칠천만 원이 되는 데는 채 이 년도 걸리지 않았다고. 아내는 결국 집을 나갔고, 겨우 아이를 보살피며 버티던 승호조차 한 달 전 법원 집행 관들이 들이닥쳐 집안 곳곳에 압류물품들을 붙이고 나자..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지닌 고통의 분량이란 것도, 온 생명들의 부침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의 존재는 자신의 생이 전부일 뿐, 우주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면 그게 내가 사는 세상이고, 전부다. 빅뱅 이후 백오십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이, 이백만 년이라는 인류의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 내 고통의 총량을 우주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다.

누구든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충분히 불행하다고. 그러니 죽을 각오를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다. 문제는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물의 고통은 지루할 만큼 우울하고, 칙칙하고, 어둡다는 것이다. 인물의 자기 연민이 지나칠 경우 제 3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오롯이 공감하기란 어려우니 말이다. 그래서 어쨌다고? 그렇게 우울하고, 힘들고, 죽을 것같이 고통스러우면.. 그럼 이제 자살하면 되겠네. 라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그런데 과연 그 방법 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고 말이다. 그가 겪는 일들은 시간으로 따지자면 이미 모두 벌어지고 난 것들이다. 되돌릴 수도, 뭔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도록 개입할 여지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1인칭 시점보다는 전지적 3인칭의 관점이었다면 조금 더 몰입하기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너무 자기만의 관점에 빠져 있다 보면, 모순을 발견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금 객관적인 서술자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형식이라야 인물의 고통을 부담스럽지 않게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본다. 그렇게 자폐아 아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 승호는 결국 아내가 죽었다는 처형의 연락을 받고, 그녀가 남긴 팔 천 만원이 남아 있는 통장을 받아 든다. 그리고 잠시 외도의 대상이었던 첫사랑 여인의 남편이 부도가 나서 외국에 나가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고, 직권 면직 무효 소송에서 이겨, 다음 학기에는 복직이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제야 그는 <충분치는 않지만 생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조금 생기고, 기쁨을 나눌 애인이 생기더라도, 그의 자폐아 아들과 지내는 생활은 여전할 것이며, 그가 대학에서 받는 대우는 달라질 게 없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여행하는 7번 국도는 기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했었고, 여행지로도 유명한 경로이다. 나는 김연수 작가의 <7번 국도>라는 책에서 이미 접했던 곳이라 개인적으로 친근함마저 느끼는 장소인데, 실제 가 본적은 없지만 마치 그 길 위에 서 본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드는 장소이다. 김연수의 작품 속에서는 자전거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느끼는 감상들이 여행기 형식으로 쓰여 있었다. 당시만 해도 7번국도는 동해안 전 노선이 왕복 2차선 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였다. 4차선 도로 확장 이후 지금은 자동차 전용도로가 되어 해안을 따라 자전거 여행은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누구나 '한때는 희망이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과 평범함 속의 무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단어와는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바로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여행이다. 길들 위에서 우리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고, 이기적이었던 나를 반성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고,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생에 대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끝없이 길을 걷다 보면 계속 연결되는 그 길 위에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지도 깨닫게 되고,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이내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이 보일 것이다. 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 내가 만났던 사람들, 먹었던 음식들, 들었던 음악과 보았던 영화들 모두 길 위에 서면 내 등 뒤에 있는 것들이니 말이다.

충분치는 않지만 생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찾아 든다. '생은 난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을 기억하라' 라는 호피 족의 말을 떠올린다. 길은 시작도 끝도 없다. 하나의 길은 세상의 모든 길과 연결되어 있기에.

가끔 너무 되는 일도 없고,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억울하고, 분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면 내가 행복했던 그 순간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내가 사랑했던 기억들이 다 거짓말처럼 말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자주 망각하는 동물이다. 여행의 기술이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연결되고, 내가 절벽 끝이라고 느꼈던 그 지점에서 또 다른 경로를 찾게 되는 것. 뒤돌아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그러니 고통스런 순간에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갈 거라는 걸. 담담하게, 그러나 씩씩하게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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