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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악마
모 헤이더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모 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는 도쿄로 난징 대학살에 대한 증거 필름을 보기 위해 영국에서 온 20대 여성 그레이가 동경대의 중국인 교수 스충밍을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의 진행은 그레이의 시점과 난징 대학살 당시 스충밍이 쓴 일기의 시점으로 교차되어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부딪히고, 교차되면서 극의 몰입도는 점점 더해지고, 마지막에 가서야 맞닥뜨리게 되는 충격적인 진실 앞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 작품은 잊고 있던 과거에 대한 감동적인 역사 소설인 동시에, 굉장히 탄탄하게 잘 쓰여진 스릴러이기도 하다. 특히 과거의 스충밍이 겪은 현장에 대한 기록은 작품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살벌하고, 끔찍한 그 역사의 한 페이지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지난 달에 장예모 감독의 <진링의 13소녀>라는 영화를 보았었다. 그리고 소문만 무성했던 걸작, 모 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를 읽으면서, 나는 마치 내가 역사의 한 순간을 체험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들은 영화나 책을 통해서만 그 참상을 겨우 '짐작' 할 뿐이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던 그 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비명이 멎자 세상은 다시 정적에 파묻혔다. 하지만 내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책상에 앉아있다. 창문은 아주 조금 열어두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다. 도시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다.
역사 속의 어떤 사건이 제대로 기록되기까지 수많은 의견대립과 논쟁이 벌어지는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홀로 코스트가 20세기 서양의 대표적 역사논쟁이라면 난징 대학살은 중국과 일본의 지루한 역사전쟁을 통해 진실이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실’보다는 ‘진실’을 중요하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 경험을 통해, 상대적인 관점이 아닌 절대적인 관점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진실'말이다. 올해 읽은 세 편의 작품 <유럽의 교육>, <회색세상에서> 그리고 <난징의 악마>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겠다. 세 작품 모두 과거에 인간이 저질렀던 악마와 같은 행동들에 대해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전혀 다른 색깔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들은 정서도, 감동도 매우 달라 굉장한 여운을 남겨 준다.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살 소년 야네크와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살 소녀 조시아, 희망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는 대학생 빨치산 대원 도브란스키가 주요 인물이다. 전쟁으로 인해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 깊은 숲속에 숨어사는 빨치산들 모두,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존이다. 열여섯 소녀가 원하는 건 소박하다.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 그런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열네살 소년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음악에 마음을 빼앗길 줄 안다.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래, 결국 예술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앞에서 순수하게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 작은 소년은 무려 전쟁의 한 복판에서 음악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전쟁의 한 복판을 통과하는 사람들 속에서 로맹가리의 믿음은 가슴이 울컥해질만큼 멋졌다.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는 1941년 리투아니아를 배경으로 스탈린 지배하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비극을 열다섯살 소녀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다섯 소녀 리나는 뭉크의 그림을 좋아하고 장차 화가가 되길 꿈꾸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남동생과 함께 소비에트 비밀경찰에게 끌려간다. 강제로 열차에 태워진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길고도 험난한 여정에 오른다. 사망자가 속출하는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그들이 당도한 곳은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였다. 리나는 수용소에서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고, 글로 써서 기록한다.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연락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매일 밤 모여서 각자의 그리움과 소중한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눈이 내리고, 기온은 계속 곤두박칠쳤고, 배고픔에 위가 아프고 쓰릴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밤에 모여 서로에게 받는 작은 위로로 인해 일도, 추위도 참을 수 있었다. 히틀러나 스탈린, 둘 중 누구 손아귀에 있든 이 전쟁으로 모두가 끝장날거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미움과 원망 대신 희망과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 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는 일본인들이 저질렀던 난징 대학살에 관한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어, 이들 두 작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나치의 유대인 학살, 스탈린의 대 숙청, 그리고 난징 대학살의 한 복판에 서서, 현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상상조치 하지 못할 끔찍한 일이 벌어진 그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건 들을 외면하고픈 과거의 과오로만 남겨둘 게 아니라,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환기시켜 준다. 새삼 느껴지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그것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기록'이 아니라 '소설'이니 말이다.
잔인하고 위험한 역사 속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들!
사실 스충밍 교수가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난징 대학살을 담은 필름을 보여달라고 집요하게, 거의 집착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매달리는 주인공 그레이의 집념은 독자의 입장에서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 그레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공감이 가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인물 군상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극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건 작가의 대단한 능력임에 분명하다. 이 작품은 뭐랄까, 굉장히 다크한 포스를 뿜어내는 작품인데, 뭔가에 홀린 듯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할까. 이렇게나 무겁고, 스릴 넘치고, 그리고 불편한 이야기이라 머리가 피곤해지는데도, 그럼에도 페이지의 끝까지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매혹을 선사한다.
그레이는 어린 시절 우연히 주황색 표지에 수북이 쌓인 시체들 사진이 붙어 있던 책을 읽게 된다. 그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징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조차 없던 그녀였지만, 충격적인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문제는 주변 사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들 그녀가 꾸며낸 이야기라며, 그런 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가 전부 상상해낸 거라고 입을 모은다. <세상 어디서도 그런 잔학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일본군이 잔혹하고 무자비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 입에 담지 못할 고문까지는 절대 자행하지 않았을 거라고> 유일하게 자신이 알게 된 걸 증명할 수 있는 책을 잃어버린 터라, 그녀는 직접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구 년 칠 개월 십팔 일만에, 1937년 난징에서 촬영된 필름이 있고, 그걸 직접 목격하고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직접 확인하러, 스충밍 교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제 인생의 절반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바쳤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레이의 심정은 공감대 형성이 되지 않아, 초반 스토리가 진행될 때는 좀 당황스럽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가며 진실규명에 집착하는 것일까. 싶을 만큼 그녀는 무모했고, 간절했기 때문이다.
"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특정 범죄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들이 자행한 만행들 대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살상 게임, 강간. 하지만 전 교수님께서 직접 목격하신 특정 만행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아요. 다들 제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충밍 교수는 그녀에게 필름을 보여주는 조건을 내건다. 무일푼으로, 무작정 도쿄로 왔던 그녀이기에 교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까지 묵을 숙소도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신주쿠 가부키초의 유명 클럽에서 호스티스로 일을 하게 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스충밍 교수가 제안한 것은, 가끔 클럽에 들르는 도쿄 최대의 야쿠자 조직의 보스인 후유키가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래 알아내라는 것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거의 목숨 걸고, 위험천만한 곳으로 뛰어들게 된다. 꽉 짜인 스토리는 빈틈없이 메워져 있고, 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미스터리와 숨돌릴 틈 없는 긴장감은 굉장하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레이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면서 이상하리만큼 난징에 집착하는 그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거 알아요?
파티에서 돌아온 그는 내 방을 찾아와 말했었다.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우리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완벽히 메워줄 수 있는 관계예요.
자신의 죽은 아기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레이와 괴물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특이한 취향의 제이슨은 매우 기묘한 관계이다. 서로에게 마치 자석처럼 끌리는 그들의 위험한 사랑.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인 후유키, 무시무시한 오가와 간호사 등 캐릭터들은 하나씩 떼어내어 다른 작품을 쓸 수도 있을 만큼의 아우라와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평범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수 십년 전 난징에서 벌어졌던 바로 그 일 때문이다.
대체 1937년, 중국 난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당시 4개월간 벌어진 일본인들의 살육, 강간, 약탈은 일명 ‘난징 대학살’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물론 그들의 만행이 역사로 기록되는 데에만 60년 이상의 논쟁이 필요했다. 감춰졌던 학살의 진실을 대중에게 알렸던 인물로 중국계 미국 작가인 아이리스 창이 있다. 모 헤이더는 이 작품의 서문에 <이 작품은 용기 있는 지성으로 어둠 속에서 '난징'이라는 이름을 꺼내준 아이리스 창(1968~2004)에 바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창은 <난징의 강간>(1997)을 펴내며 가해자인 일본, 피해자인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의 목격자 시선으로 난징 대학살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출간 이후 일부 역사가들이 책에 실린 사진의 진위와 내용의 부 정확성을 문제 삼아 논쟁이 불거졌고, 일본 우익들의 끊임없는 협박 전화는 그를 심한 우울증을 겪게 했으며,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하고 만다.
"무지와 악이 같지 않다고 하셨죠? 기억하시나요?"
"그래요. 기억해요."
"정말인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무지는 악이 아닌가요?"
"물론이죠.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로요?"
"그럼요.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어요. 무지는 악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묻습니까?"
"왜냐하면..... 왜냐하면...."'
난데없이 찾아 든 묘한 기분이 내게 힘을 북돋아주었다. 살짝 어지러움도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니까요."
모 헤이더는 지난 2012년 <실종>이라는 작품으로 에드거 상을 수상했다. 워낙 데뷔작부터 베스트셀러가 되고, 매 작품마다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을 했던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데뷔작인 <버드맨>은 국내에 바로 출간이 되었었는데, 그 2001년 이후 이번 <난징의 악마>가 출간되기까지는 무려 12년이나 걸렸다. 그녀의 데뷔작은 출간 당시 '토마스 해리스의 작품 보다 재미없으면 책값을 돌려드립니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홍보문구를 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화제였는데 아마 국내에서는 그만큼 호평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난징의 악마>는 그녀의 세 번째 작품인데,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이 남성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졌다면, 이번 작품은 여성 주인공 1인칭으로 그려진다는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모 헤이더의 작품 리스트>
출간년도 |
원서 |
제목 |
국내출간 |
비고 |
2000 |
Birdman |
버드맨 |
2001년 10월 |
데뷔작 |
2002 |
The Treatment |
트리트먼트 |
|
WH 스미스 썸핑 굿 리드 상 수상/현재 영화로 제작중 |
2004 |
The Devil of Nanking |
난징의 악마 |
2013년 10월 |
엘 매거진 범죄소설 상/SNCF Prix du Polar 상 수상 |
2006 |
Pig Island |
피그 아일랜드 |
|
배리 상 후보/ CWA대거 상 후보 |
2008 |
Ritual |
의식 |
|
CWA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상 후보/배리 상 후보 |
2009 |
Skin |
스킨 |
|
ITW 스릴러 상 후보 |
2010 |
Gone |
실종 |
|
에드거상 수상/CWA 라이브러리 대거 상 수상 |
모 헤이더와 비견될만한 작가로, 일본의 기리노 나쓰오가 생각난다. 여성 작가답지 않은 포스를 자랑하는 작품의 분위기도 그렇고, 스케일도 그렇고, 어둡고 다크한 포스를 뿜어내는 마력도 있으니 말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국내에 꽤 팬이 많은 편인데, 그녀의 작품을 즐겨 읽는 이들이라면 모 헤이더의 작품과도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번에 출간된 <난징의 악마>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한 소설이지만, 단지 그 충격적인 진실을 까발린다는 것보다 더한 스릴러 소설로서의 재미도 충분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