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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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내가 보는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질 것이다. 모든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고, 어딜 가도 내가 주인공인 것만 같고, 평소에 마음에 안 들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음악처럼 들리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예뻐 보이고, 매 순간 설레 이는 것이 바로 연애를 시작할 때의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혹은 나처럼 한 사람과 오랜 기간 만나고 있다면, 어쩌면 앞으로도 이런 풋풋한 두근거림을 느끼게 될 일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순간, 연애를 시작할 때 즈음에만 우리는 그 감정에 도취되어 어딘지 멜랑콜리한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는 거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설레이는 기분을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곤 한다. 이상하게도 매번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가 쓰는 책들이 항상 연애 소설인 것만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책들이 모두 연애 소설 같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문장들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공감되고, 소재를 통해 형상화되는 장면들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쓴 단편들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다. 그리고 이 중에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2005년쯤에 썼던 단편으로. 원래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쓰였었다고 한다. 당시에 완성을 하지 못해서 발표를 못했고, 이 제목을 다른 글에 쓰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동명의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소설집을 이미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에 수록된 단편을 읽으면서 기분이 묘했다. 사실 제목이야 작가 마음이라 이런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면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제목에 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국내 소설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제목을 멋지게 짓는 사람이 김연수 작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작품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도 그렇지만, <세계의 끝 여자친구>,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등등. 어쩌면 제목에 낚여서 책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을 만큼 제목이 아름답다. 지난번 문학동네 팟 캐스트에서도 제목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이 됐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원래 제목이 <심야 기린 통신>이었다고 한다. 약간 복고풍의 느낌을 주기 위해 지은 제목이었는데, 주변 반응이 별로라서 그냥 한글로 바꿨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구체적인 단어들로 바꿔놓으면, 단어들이 부딪히니까, 부딪히면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작가의 겸손이겠지만 비단 그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유독 다른 작가들에 비해 제목 짓는 감각이 남다른 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모의 꿈은 '미국 놈 마누라'가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모의 꿈은 소박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모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들 이모보다 먼저 죽었다. 너무 너무 너무 많은 고통과 너무 너무 너무 많은 눈물로 범벅이 된 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이모가 병상의 폴에게 읽어준 그 시는 원래 이모가 출연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읽어달라고 했던 시였다. 제일 먼저 그 사람이 죽었고, 그 다음에는 이모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이 세상에는 어둠만이 아니라 빛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이모에게는 죽어가면서 봐야 할 얼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거기에, 자기 삶에, 엄마의 얼굴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아기처럼, 폴이 숨을 거뒀을 때, 이모는 처량하고 불쌍한, 말하자면 고아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중에서

 

이번 작품 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굳이 꼽아 보자면, <벚꽃 새해>, <동욱>, <우는 시늉을 하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표제작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것이 꿈이었던 이모의 지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 스토리만 보자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인데 김연수 작가의 손에 의해 들려지는 이모의 사랑 이야기는 뭐랄까. 매혹적이다. 흔해 빠진 불륜 스토리가 아니라, 어딘지 가슴 먹먹하게 남아 있는 고귀한 누군가의 첫사랑에 대한 고백 같다고 할까. 젊은 시절 배우 였던 이모는 영화 감독과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둘만의 도피를 떠나 3개월 동안 그렇게 살림을 차리고 살았었다. 물론 감독의 부인이 찾아와 남편을 데려갔고, 이모는 그 뒤로 미국 사람과 결혼해 외국에서 살다가 그가 죽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저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것이 소박한 꿈이었던 이모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남자들을 모두 먼저 떠나 보내야 했다.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은 문숙이라는 배우이고, 그녀가 삼포 가는 길의 이만희 감독과 보낸 1년의 시간에 대해서 출간했던 책을 읽고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물론 실제 이야기보다 김연수 작가가 그린 스토리가 더욱 매혹적이다.

 

이모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 <함석 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라는 대목이다. 사월에는 미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다던 빗소리라니, 어쩌면 이런 문장을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예쁜 단락이다. 미래가 없던 두 연인이 3개월 동안 살았던,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의 함석 지붕 집이라는 설정은 스팅의 새 앨범 중에 ‘Practical Arrangement’의 가사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머리 위에 하나의 지붕이 생기고, 우리가 돌아갈 따뜻한 집이 생기겠죠>라는 대목. 결혼을 사랑하는 두 연인이 하나의 지붕 아래서 산다는 의미로 표현한 가사가 참 좋았는데, 역시나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도 그와 같아 나를 다시금 설레게 만들어주었다. <매일 밤, 밤새 정감독의 팔을 베고 누워서는 혹시 날이 밝으면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러다가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또 움직이면 그가 깰까 봐 꼼짝도 못하고 듣던, 그 빗소리 말이다> 인생을 한번 더 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사랑의 기억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닐까. 지금 현재가 행복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또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나는 그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 아이를 안아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담임과 학생이라는 우리의 관계가, 그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인연이, 그리고 순진한 태도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나의 초라함과 무능함이, 아니, 그보다는 거기까지 찾아갔으니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그 아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두 손이 어색했던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동욱중에서

 

개인적으로는 단편 보다는 장편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플롯이 복잡하고, 등장하는 인물이 많을수록 더 많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이야기보다는 관계 도를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하는 스토리에 더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몇몇 작가들의 단편은 매우 훌륭하다. 김연수 작가도 그 중 한 명인데, 단편이지만 거의 장편으로 확산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에 밀도가 있고, 그만큼 풍성한 이야기의 볼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작품이 망하더라도 장편이 훨씬 더 좋다>고 밝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단편도 매우 사랑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편은 일상의 삶에 가깝고, 단편은 일종의 여행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장편은 지루한 일상을 계속 보여주고 클라이막스 때 사건을 터뜨려야 감동이 오는 거라면, 단편은 제일 중요한 장면만 딱 떼어내서 보여주는 거니깐 말이다. 그는 <삶의 모순된 걸 보여주면서 충돌되는 걸 보여 줘야 하는데, 단편은 그게 어렵다>며 장편을 선호하는 이유를 밝혔는데, 작품마다 장편, 단편의 장점이 각각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단편을 통해서도 이야기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깊은 울림을 남겨주니 장편만큼 밀도가 있는 단편일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을 항상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소재 자체가 특별하지도 않고, 스토리가 복잡하지도 않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풀어지는 지 그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범한 소재를 통해서 절대 다른 이야기로는 환원 불가능한 스토리, 김연수 밖에 쓸 수 없는 그런 스토리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만들어내는 문장의 호흡과 행간의 여백이 나는 참 좋다. 그래서 그의 책은 꼭 여러 번 다시 읽게 된다.

 

작가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읽는다.

 

김연수 작가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든지 간에,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사소하더라도 깨달음을 얻게 되니까 말이다. 책을 통해서 몰랐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때로는 상처를 치유 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가끔은 위로 받는 기분도 들곤 한다. 극중 인물과 나를 동일시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내 주변의 누군가와 비슷한 인물을 발견하는 경우도 생기며,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피해 잠시나마 설레 이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전적으로 캐릭터가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 인물이 나에게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김연수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삶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는 객관적인 서술자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작품 속으로 매번 빠져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란 그렇게 이미 지나가버린 일들에 대한 현재의 관점에서 진행하는 해석이어야만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덜 상처받고, 덜 고통 받고, 위로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살면서 숱하게 부딪히는 모순과 진실을 찾아가는 것은 실제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 작품은, 김연수밖에 쓸 수 없는 글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그렇게나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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