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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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하라 료의 신간이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내가 죽인 소녀>를 잇는탐정 사와자키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안녕 긴 잠이여>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었던 꿀 맛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평상시에 책을 굉장히 빨리 읽는 편이다. 시간을 쪼개어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읽으려다 보니 생긴 습관이기도 하고, 재미난 책의 진짜 묘미는 두 번째 읽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책을 빨리 읽은 뒤에 좋은 책은 여러 번 읽는 방식으로 꽤 오래 습관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하라 료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천천히 아껴서 읽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내용이 지루해서 진도가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다음 내용이 궁금한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천천히 아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급하게 후루룩 읽어서 페이지를 끝내버리고 싶지 않고, 가능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 있게,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맛을 음미하듯이 문장들을 꼭꼭 씹어먹고 싶다. 오래 기다렸으니, 그만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고나 할까. 그래서 책을 읽는데 무려 일주일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어떤 책들은 후다닥 읽고 리뷰를 쓰기도 했으니 얼마나 이 책을 아껴가며 읽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라 료가 작품을 쓰는 스타일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책을 늦게 쓴다고 독자까지 덩달아 천천히 책을 읽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뭐 암튼.

 

 

하라 료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과작(寡作) 작가이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을 썼을 뿐이다.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는 전작 이후 6년이 걸렸고, 네 번째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는 9년이 걸렸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국내에 출간된 <내가 죽인 소녀> 이후에 이번 작품이 나오는데도 4년이 넘었다. 이건 뭐 '기다릴 테면 기다려봐!'는 식의 으름장을 놓는 것도 아니고, 팬들이 기다림에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 태도가 하드보일드와 너무도 잘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어딘지 마음에 든다. 집필 스타일 뿐만 아니라 전개되는 내용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한치의 오차 없이 똑같은, 정직한(?) 작가라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이다. 이러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의뢰인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하는 조바심이 들 정도가 되어야,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기에, 그렇다면 초반 100페이지 동안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직접 읽어보시라. 왜 하라 료의 팬들이 그의 작품을 이리 오랜 시간 기다려서 읽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주쿠에 위치한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 중인 탐정 사와자키. 그가 사백여일 동안 도쿄를 떠나 있다 오랜만에 돌아오면서 맡게 되는 사건은 십 일년 전 승부 조작 사건에 얽혔던 전직 고교 야구 선수가 의뢰한 누나의 자살문제이다. 당시에 의뢰인인 우오즈미 선수의 가방에서 다섯 개의 돈뭉치가 나와 승부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일주일 뒤 그의 혐의는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지도, 동생과 통화를 하지도 못한 그의 누나가, 풀려나기 전날 아파트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십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나는 그런 일로 자살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명백한 자살이고, 사고나 타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는 '누나가 그런 문제로 자살할 리가 없다'는 말을 십일 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걸까. 앞서 밝혔지만 의뢰인인 우오즈미를 사와자키가 만나는데 무려 100페이지 정도가 할애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고 정식으로 의뢰를 한 다음에 우오즈미는 갑자기 낯선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러니까 의뢰를 받기 전, 후 모두 이 사건은 오로지 사와자키 스스로 알아보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증거도 없고, 물증도 없는 십일 년 전의 사고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선다. 그리고 당시의 증언을 했던 세 명 모두 정확하지 못한 사항을 증언했다는 걸 알게 되는 등 일련의 사항들을 통해 우오즈미 유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타살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 된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하드보일드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작품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챈들러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라는 건 눈치 챘을 것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가 참 좋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밖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로는 지저분한 사무실 벽의 얼룩을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은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탐정의 업무 목록에 의뢰인의 침대 옆에서 마음을 졸이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블루버드를 몰고 나와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는 정도의 불필요한 수식을 뺀 무덤덤하고 시크한 행동.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조차 무모하게 용기 있는 순수함(?) 이라고나 할까.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한다거나, 자신이 피해를 볼만한 상황에서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흔히들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라 칭해지는 부류는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사회의 모습을 불필요한 수식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으로 지칭된다. 추리소설에서 추리사건해결그 자체보다는 탐정의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런 류의 작품은 감정과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는 차가운 정서를 대표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하드보일드 작품의 캐릭터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사실 아이러니 하긴 하다. 가끔은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밉지 않고 정이 가는 캐릭터들이라고 할까. 아뭏튼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 캐릭터들인 것 같다.

 

작품의 후반에 실려 있는 번역자의 멘트가 재미있어 옮겨본다.

 

역시 하드보일드란 바로 이런 거다, 라고 간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 하라 료도이거다라고 정의를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예를 들어 그 조건을 설명합니다.

 

“《빅슬립》(출판사에 따라 《깊은 잠》 《거대한 잠》 앞머리에 어느 저택을 방문한 탐정 필립 말로에게 버릇없는 그 집 막내딸이키가 크네요?”라고 삐딱한 태도로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현실적으로는 히죽히죽 멋쩍게 웃어넘기거나 아니면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다.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그러면 실격이다.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가 없는 가로 독자는 그 소설을 판정하게 된다. 말로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빅슬립》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여기서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어진 한국어판을 기다려준 분들을 위해 그 답을 영문으로 적어둡니다. “I didn’t mean to be.”

 

 

레이먼드 챈들러의 깊은 잠을 다시 뒤져보니, 해당 장면이 기억이 났다.

 

키가 크네요, 그렇죠?” 라고 묻는 그녀에게,

필립 말로가 대답한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오.”

 

 

, 이제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되는가?

 

이래서 내가 필립 말로를, 사와자키를, 그리고 하드보일드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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