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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결국 나무에 새겨진 그런 말들은, 세월이 지나면 마치 기차역 옆 식당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즉석 음식을 주문 받는 요리사가 그릴에 깬 계란처럼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정식 요리처럼 대리석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마치 멋진 거리를 떠난 말이 하늘로 날아가듯 할 것이었다.
나는 음영이 드리우는 석양에 그레이브야드 하천에서 낚시를 드리웠으며 꽤 많은 송어를 잡았다. 죽은 자들의 가난만이 나를 괴롭혔다.
제목만 보면 웬 낚시하는 방법에 대한 책인가 싶겠지만,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당연히 이 작품에선 송어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여행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송어로 상징되는 목가적인 꿈을 찾아, 송어가 뛰놀던 강을 찾는 남자의 여정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과 미국사회에 대한 풍자성이 짙어, 미국적인 은유와 상징이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지 말고, 스토리적인 면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너무나 가볍고 쉬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에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므로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으려고 하는 주인공의 여정이 낯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우티건의 팬임을 자처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작품이 순수하고, 엉뚱하고, 즐거운 사고를 한다고 말한다. 짧고 간결한 문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은유들은 우리를 상상도 못했던 곳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마치 송어처럼 투명한 느낌의 단어들과 상상력으로 충만한 문장들은 읽는 재미도 주지만, 머리 속에 잔상도 남겨준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나는 내 친구의 삶을 위해 10달러를 지급하고는 208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알아낸 것이다. 어떻게 그 번호가, 녹아 흘러내리는 눈처럼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오랫동안 다른 고양이를 보지 못한 탓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마지막 고양이라고 믿으며, 전혀 두려움을 모른 채, 화장실 바닥엔 온통 신문이 깔려 있고 프라이팬 위에서는 맛있는 요리가 끓고 있는 '미국의 송어낚시 호텔'에서 장난치며 살고 있는 한 마리 작은 고양이의 이름이 되었는지를.
모든 에피소드들이 다 재미있었지만,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는 208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에 대한 에피소드이다. 그 고양이는 아주 작았을 때부터 다른 고양이를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지구에 살고 있는 유일한 고양이로 생각한다고 했다. 방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고, 다른 고양이도 본 적이 없다는 당연히 그러지 않겠는가. 나도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고 있는데, 우리 집 강아지도 좀 독특한 놈이다. 이상하게도 이 놈은 어릴 때부터 산책을 데리고 나가거나, 동물 병원을 가거나 할 때 다른 강아지들을 만나도 좀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산책 길이든 어디든 강아지들은 서로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거나, 냄새를 맡거나 짖게 마련이다. 그렇게 다른 강아지가 다가와도 우리 집 강아지는 모른 체 하거나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이 놈은 분명 자기가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라고 했을 정도로. 208 고양이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는데, 문득 우리 집 강아지가 떠올라서 피식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비슷할까 하고. 브로드웨이와 콜럼버스 가에서 반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낡고 싸구려 호텔인 '미국의 송어낚시',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마지막 고양이라고 믿으며, 전혀 두려움을 모른 채 살고 있는 한 마리의 작은 고양이 208. 이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하루키의 어떤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하루키가 브라우티건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번에 비채에서 출간되고 있는 모던 & 클래식 시리즈의 작품들은 모두 표지가 너무나 산뜻하고 예쁘다.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모던 & 클래식 시리즈 작품인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와 존 스타인 백의 '붉은 망아지, 불만의 겨울' 세 권을 함께 책장에 꽂아두면 책장 전체가 화사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멋진 색감과 디자인의 책은 읽기에도, 소장하기에도 너무나 행복한 일이니 말이다. 어쩜 이렇게 책과 잘 어울리는, 산뜻한 표지를 뽑아낸 건지 감탄스럽다. 게다가 중간중간 삽입된 삽화들도 책의 감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존에는 꽤 얇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메타포들로 인해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꽤 있었는데, 아마도 이번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만나보면 그런 불만들이 쏙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