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카니발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 다니엘 홀베 지음, 이지혜 옮김 / 예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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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내에선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독일 스릴러계의 거장이라는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유작이다. 소설 집필 중에 작가가 사망을 해서, 책의 나머지 부분을 다른 작가가 완성한 다소 이색적인 작품인데요. 율리아 뒤랑이라는 주인공으로 시리즈가 열편이 넘게 만들어져 있던 상황이므로, 이미 탄탄하게 구축된 캐릭터들은 사건 속에서 알아서 이야기 진행에 피와 살을 부여한다. 작가가 캐릭터를 살아있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잘 그려놓으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저절로 흘러가게 마련이니까. 그만큼 안드레아스 프란츠가 캐릭터 구축을 잘 해놓았단 얘기도 되겠고 말이다.

 

 

여대생이 참혹하게 강간 살행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함께 파티를 즐겼던 나머지 두 명의 여대생과 남학생 세명. 그중 일찍 돌아가 알리바이가 있는 한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넷은, 술과 약에 취해 그날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참석자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광란의 파티.. 과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러 명의 용의자와 그들을 수사하는 여형사,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아는 전작에서 범인에게 성폭행과 감금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형사로 설정이 되어 있다. 벌어진 사건과 주어진 상황이 모두 다음 장면을 빨리 넘기고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전제 조건이다. 실제 그날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기가 조바심이 막 나려는데... 이 책은 거기서 갑자기 전개를 멈추고 쉼표를 찍는다. 책은 사건 수사가 막 전개되는 30프로 정도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2년뒤로 훌쩍 시간을 뛰어 넘어 버리는 것이다. 

 

     

 

 

2년 뒤에 벌어진 새로운 사건에서, 과거의 해당 사건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 범인이 점차 밝혀지는 전개인데, 사실 초반에 비해서 중반 이후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2년 뒤의 이야기는 디스크로 병원에 있는 베르거 과장을 대신해 직무 대행으로 율리아가 그 자리에 앉고, 나머지 수사11반 팀원들이 주로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 뛰어다닌다. 우리의 주인공인 율리아는 그저 책상에 앉아서 보고를 듣고, 지시를 내리는 게 다이다. 왜 굳이 프랑크를 제치고 율리아가 과장의 신입을 받아 직무 대행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율리아라는 캐릭터는 이 작품에선 조금 미약하지 않았나 싶다.

 

 

"모르겠어요. 사실 그 두 사람은 알고 보면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르거든요. 그런데도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몇 년 전부터 경찰청의 드림커플로 소문이 나 있어요. 게다가 이젠 아이까지 낳게 됐죠. 그냥 그렇단 얘기에요. 전 배우자 하나 만드는 데도 실패했으니까."
"율리아, 안타깝게도 이 늙은 애비는 그 문제를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구나...네 동료의 행복을 보면서 우울해하거나 네가 옳은 길을 선택한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 혼자 가는 길이 더욱 어려워질 뿐이야. 그 동료와 함께 앞길을 가거라. 그 사람도 분명 기뻐할 거야. 프랑크와도 함께 하고, 필요할땐 신과 함께해라. 인생의 동반자가 많으면 누구도 쉽게 널 해칠 수 없단다."

 

 

대신 율리아가 전작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과 그녀의 심리에 대해서는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 덕에 그녀가 인간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직장내에서 흔히들 있을 수 있는 동료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질투, 오해 등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 주인공이라고 해서 마냥 이해심많고, 무조건 착하기만 한 캐릭터는 매력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다름 시리즈가 출간이 된다면 그녀의 활약이 궁금해서 보게 될 것 같긴 하다다. 이번 작품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율리아의 여형사로서의 활약이 궁금해졌다. 율리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넌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아마도 그것이 제가 이 책에서 보지 못한 그녀의 숨겨진 면일테니까 말이다.

 

 

주인공의 역할이 다소 아쉬운 반면 이 책의 진짜 장점은 수사11반의 프랑크와 자비네, 그리고 페터와 도리스라는 캐릭터가 부각이 되어 그들의 실감나는 수사 과정을 지켜보는데 있다. 수사 회의 과정, 조사하는 과정들이 모두 상세히 묘사가 되어 있어, 마치 내가 수사11반의 한 팀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구체적인 묘사와 사건 수사 과정이 기재된 소설은 많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작가의 충분한 자료조사와 해박한 지식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는 것일 테고.

 

 

"평범한 사건은 아니었어요: 자비네는 숙고를 거듭했다.
"풍기 단속반 때의 일은 아닌데. 아니, 그때였나? 아, 빌어먹을. 살인사건이 너무 많다 보니까."
"알아." 프랑크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범죄수사직 공무원으로 일하다보면 순간순간,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이 일을 한 건 아닌지 회의가 들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지난 사건들의 세부 내용을 잊어버리는 게 이미 전문가가 됐다는 증거일까? 온갖 시신들의 모습을 항상 뇌리에 다고 있는 형사는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특별한 존재로 기억될 권리 또한 누려야 하지 않을까?

 

 

자비네와 프랑크의 대화에서도 보이듯이, 이 작품은 단순히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수사관들의 성격, 심리, 과정을 묘사하면서 그들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다. '감정이입'이야말로 우리가 읽고있는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장치이니까.

 

티비 뉴스, 포털 사이트 등 열어 보기가 두렵게 각종 성폭행 사건들이 연일 판을 치고 있는 요즈음이다,"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고 하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의 대사가 무려 2003년작이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2012년 현재 그의 외침이 자꾸만 생각나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뒤랑 형사, 범인들은 죽었어. 이 결말이 맘에 드느냐 마느냐는 이제 문제가 아니야. 자네가 인정하든 않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FBI와 인터폴, 혹은 몇몇 명민한 사설탐정들이 메이슨 가의 의뢰로 비디오 경로를 추적할지도 모르지. 추적할 거나 있다면 말이야. 어쨌거나 이제 이 사건은 우리 손을 떠났네."
"알아들었습니다." 율리아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감옥에나 처넣어야 마땅한 변태 자식들이 오늘 밤에도 조용한 구석방에 앉아서 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있을 걸 생각하면....."
베르거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나. 이 일을 하다 보면 생기는 부작용이지. 부아가 치미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말 믿게나. 다만 난 그걸 자네처럼 표출하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는 아무리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야."

 

 

물론 나도 베르거 과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리아처럼 범인 검거에 만족하지 않고 분노할 수 있는 이땅의 많은 형사들이 있어 우리가 더 안전한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거겠지. 현재를 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신데렐라들을 위해서 말이다. 율리아 뒤랑 형사. 그녀의 다음번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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