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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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S.J.왓슨의 데뷔작이다. 그는 병원에서 청각장애 아동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며 주말에는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런던의 파버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작문 수업을 받았고, 6개월 짜리 이 강좌가 끝나는 동안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도 흥미로운데, 1953년에 간질 수술을 받은 이후 새 기억을 형성하지 못해 줄곧 과거 속에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의 부고를 읽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크리스틴이다.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지난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말이다.

 


단기 기억상실증 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그의 기억은 단 10분 밖에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10분이 지나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거나, 자기 몸에 문신을 하면서 기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이 작품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하루 정도의 일은 기억을 한다. 그 다음날이 되면 다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 상태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에, 그녀는 부지런히 일기를 쓴다. 하루동안 들었던 일, 있었던 일들을 그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능한 많이, 모조리 기억하려고 한다. 이들처럼 기억을 단기 저장고에서 장기 저장고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 바로 직전의 일만 잠시 기억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순간만을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가 내게 주어진 시간 전부인 것이다.

 

“노 데이, 벗 투데이(No day, but Today)”

 

여기서 당연히, 뮤지컬 렌트의 그 유명한 대사, 내일은 없고, 나에겐 오직 오늘뿐이라는 문구가 기억이 나났다. 크리스틴에겐 오로지 매일 매일, 그 순간의 하루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을 20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시절로부터 기억이 완전히 멈춰버린 여자가 매일 아침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생각보다 스무 살이나 더 늙어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난 날을 송두리째 읽어버리고,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나이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 내 얼굴엔 잔주름이 있고, 쭈글쭈글해진 자신의 손을 보게 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내 침대 옆에 누워있는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나의 남편이라고 한다면? 그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고스란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극중 크리스틴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그녀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지할 데라곤 남편 밖에. 그런데, 자신이 쓴 일기장엔 <남편을 믿지말라>.고 써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날 치료하기 위해 남편 몰래 만나는 의사에게서 엉뚱하게도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와중에 문득 문득 떠오르는 끔찍한 폭행의 기억. 분명 남편은 내가 교통사고로 인해 이렇게 됐다고 하는데, 자신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폭행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편인 벤은 아들 애덤이 죽었다고 말하고, 친구 클레어는 애덤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나는 분명 소설을 한 편 출간한 적이 있는데, 남편은 내가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과연 나는 누구를, 얼마나,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내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나 자신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나는 죽은 것 같다고 썼어요. 하지만 이건 뭐예요? 더 나쁘잖아요. 이건 죽어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죽는 거예요. 더 나아졌어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꼴이 더 계속되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오늘 밤에도 자러 갈 테고, 내일 아침 눈뜨면 또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모레도, 글피도 그럴 거고 영원히 그럴 거예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난 그런 꼴 못봐요.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거지. 과거도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짐슴과 다를 바 없어요. 가장 나쁜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거예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이 적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아직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오늘 알게된 모든 사실은, 내일이 되면 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말은 곧, 타인이 그녀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는 오늘 이전에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누구든 자신에 관한 말을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무섭지 않은가.

 

그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남편도 믿을 수 없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던 의사도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싶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다. 여느 사람처럼 하루를 그 다음 날과 연결할 수 있기를 원하는 그녀는 필사적으로 일기장에 매달리고,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실체에 다가가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인물이 남편인 벤과 닥터 내시로 한정이 되어 있어,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부분이 이 작품만의 차별화가 된다. 그렇게 한정된 공간과 관계를 통해서 한 인물의 심리상태에 몰입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그녀가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을 넘어서서 스릴러물로 발전시킨다. 오로지 그녀의 정체와 숨겨진 기억에만 치중했다면 지루한 심리물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면적인 플롯 외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은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에 이르는 순간 소름이 쫙 끼칠정도였으니,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그 긴장감이란 말할 것도 없다. 타인이 말하는 과거와 그녀의 진짜 과거, 그녀가 믿고 싶은 현재와 진짜처럼 보이는 현재가 씨실과 날줄처럼 교차되어 차곡차곡 쌓인다. 묘하게도 등장 인물도 적고, 공간도 한정되어 있고, 현재와 과거와 수시로 교차하는 이야기지만, 영화화되기에 이만큼 좋은 텍스트는 없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크리스틴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 일 것 이다. 그래서 곧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더욱 반갑다. 

 

이 작품은 출간도 되기 전에 이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스콧프리 프로덕션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2014년 공개 예정으로 로완 조페 감독 연출의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로 영국에서 제작 중이다.

 


로완 조페 감독은 영화 <미션>과 <킬링 필드>로 유명한 롤랑 조페 감독의 아들이며,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다. 영화 <28주후>, <아메리칸>의 각본, <브라이튼 룩>의 각본과 연출 맡았던 감독이고, 주연은 니콜 키드먼, 마크 스트롱 콜린 퍼스라고 한다. 감독, 주연과 포스터외에 아직은 아무것도 공개된 게 없지만, 포스터의 분위기는 책 만큼이나 기대감을 준다. 무엇보다 불안한 심리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가야할 여주인공역에 니콜 키드먼이라니,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데, 그녀만큼 절묘한 캐스팅이 또 있을까 싶다.  영화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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