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화바이룽 지음, 김소희 옮김 / 서사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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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애써 닿으려 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고,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은 존재.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잖니..."

내 안에서 누군가가 몇 번이고 나를 간절하게 흔들어 깨웠다. 정말 이대로 계속 외면해도 되는 걸까.            p.17


프로그래머인 밍런은 친구와 함께 웹디자인 회사를 차린 뒤부터 밤낮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거냐고 의심할 만큼 가정에는 무관심하던 그는 어느 날 이제 혼자만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혼을 선언한다. "당신에 대한 감정이 죽었어. 어쩌면... 당신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감정이 죽은 걸지도 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말이 답답한 아내 정팡은 그의 뒷조사를 시작하고, 남편이 1년 전 동업자에게 자기 지분을 전부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매일 출근해서 어디로 갔던 걸까. 흥신소에 의뢰했지만 다른 여자는 발견되지 않고, 결국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얼마 뒤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남편이 사람을 죽여 체포되었다는 거였다. 벌레 한 마리도 무서워서 못 잡는 그가 사람을 죽였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정팡은 남편의 심리를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가 이혼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코끼리'를 내세우는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코끼리가 존재했고, 그들은 코끼리의 배 밑이자 네 발 사이에서 코끼리를 집 삼아 살며 아이 둘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제 아이들이 일곱 살, 여섯 살이 되었으니 자신은 더 이상 아빠인 척, 남편인 척 살아갈 수 없다며,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경찰의 연락 이후 변호사는 필요 없다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밍런은 결국 구치소에 수감된다. 정팡은 아이들을 데리고 면회를 가지면 그는 더 이상 오지 말라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구치소에서 전화를 걸어 명회를 와달라고 하는데, 찾아갔더니 밍런은 부탁을 하나 한다. 집 안에 숨겨둔 ‘어떤 물건’을 찾아달라고. 그리고 돌연 이튿날 구치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식기만 하는 걸까?"

안커에게서 이렇게 감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듯 추락하는 상황도 있겠지."

"하긴. 그래도 대부분은 내가 말한 것처럼 서서히 식어 가겠지."

"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만 존재하는 것 같아."              p.282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살인 사건의 진실 등 추리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이 작품은 여타의 장르소설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상실감, 평범한 모습 이면에 감춰진 비틀린 욕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관계의 파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서늘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모습 속에서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아내가 남편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과정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도 같았다. 열기 전에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고, 연 다음에는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충격적인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은 대만의 3대 문학상을 석권한 화바이룽의 장편 미스터리이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의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누구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겠지만, 이 작품 속 남편이 숨겨둔 진실은 그야말로 지독하다. 외면하고 싶을 만큼, 상상조차 어려운 재앙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비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옳다고 믿었던 인내와 포용이 점차 무관심이 되어가는 부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든 균열에 대해서 치밀하고 세심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가족과 관계의 이면을 되짚어보게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서는 깊이를 보여준다. 과연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지, 완벽해 보이는 일상 속에 숨겨진 낯선 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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