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
스즈키 고지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게이코는 문득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광경. 아니, 경치는 다르다. 한쪽은 도시 교외에 있는 주택가의 한구석, 한쪽은 인가가 흩어져 있는 동네에 외따로 자리 잡은 단독주택. 그저 자아내는 분위기가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15년 전, 집단 사망 사건이 발생한 폐가를 찾아갔을 때 감지했던 것과 똑같은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그 원천은 집을 둘러싼 식물들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무성하게 자란 식물들.              p.97


잠깐의 사랑으로 대형 출판사라는 직장과 가정을 동시에 잃고 딸의 친권만 간신히 사수해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처지가 된 게이코는 탐정 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잡지 기자 시절에 얻은 취재력과 인맥으로 경험을 쌓아 탐정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모든 생활고의 원인을 만든 겐스케가 찾아온다. 함께 저지른 불륜이었는데 그는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고 일과 가정 양쪽을 지켜냈기에 두 사람의 사이에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방세가 석 달이나 밀려서 사무소 유지조차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가 가져온 일감을 덥썩 받아들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의 부모로부터 혹시 존재할 지도 모르는 손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15년 전 아들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은 뒤 실의에 젖어 사는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꽃다발이 도착했는데, 아들에게 당시 연인이 있었기에 혹시 손주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손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사람 찾기의 일반적인 시세를 훌쩍 뛰어넘는 보수에 게이코는 15년 전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조사는 15년 전에 있었던 작은 신흥 종교 단체의 신도들이 집단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연결된다. 단체의 이름은 '꿈꾸는 허브 모임'으로 식물을 주로 다루며, 온건한 교의를 표방해 인근 주민과 마찰도 없었고, 여성 신도만 모아서 조촐하게 운영하던 교단이었다. 사건은 당시 본부 시설에서 공동 생활하던 8명 중 7명이 정원 여기저기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제삼자의 흔적은 전혀 없었고, 내부에 수상한 점도 없었으며, 부검을 한 이후에도 명확한 사인을 확정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진화의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알기 쉬운 색의 변화는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경고를 통해 식물은 자신들의 의도를 전하려는 것이죠. 중요한 건 귀를 잘 기울여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겁니다. 식물이 인간에게 기대가 남아 있다면 몰라도, 이미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었다면 끝입니다. 거추장스러운 인간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난리법석을 피워도 이미 늦은 겁니다. 더는 손쓸 방법이 없어요.               p.253


TV 밖으로 기어 나오는 귀신이 나오는 《링》으로 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호러의 제왕’ 스즈키 고지의 신작이다. '지구 생명의 역사를 식물의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세계가 자아내는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계의 구조를 근원부터 뒤흔들며 대담한 스토리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도쿄 도내의 한 맨션에서 의문사 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집은 내부에서 자물쇠를 잠근 밀실 상태였고, 부검을 했지만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요코스카의 자위대 관사에서 비슷한 의문사가 또 발생한다. 돌연사한 두 남성은 모두 서른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지병도 없었다. 이 사건은 15년 전에 있었던 작은 신흥 종교 단체의 신도들이 집단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연결된다. 15년의 간격이 있는 두 사건에 공통적인 인과 관계는 무엇일까. 


탐정 게이고, 사건에 대해 르포를 썼던 작가 우에하라, 물리학자 츠유키, 주간지 기자 유리까지 네 사람이 함께 단서를 좇으며 사건의 실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스즈키 고지는 존재하지 않는 문자로 기록된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책인 보이니치 필사본, 남극에서 채취된 얼음 속 미생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돌연사 등을 인류의 문명과 언어의 기원, 그리고 과학적 정보들을 토대로 매력적인 스토리로 탄생시켰다. 제목인 '유비쿼터스'란 어디에든 있다는 뜻이다. 지구 생명체의 총중량 중 99.7퍼센트를 차지하는 식물이 극소수인 동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면 어떨까. 스즈키 고지는 놀라운 상상력을 탄탄한 구성과 치밀한 전개를 통해 현실로 구축시켜 보여준다. 인간의 문명을 식물의 시점에서 다시 읽는 다는 설정만으로도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스즈키 고지는 이 작품을 4부작 시리즈로 구성했다고 한다. 2부는 미국, 3부는 대항해 시대, 4부는 인류의 우주 진출을 그릴 예정이라고 하니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도 매우 기대가 된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차원의 공포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