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관리국
캘리앤 브래들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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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이주자들은 어디서......?"

"역사 속에서 왔어요."

"뭐라고요?"

아델라는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할 줄 알거든요." 말투가 꼭 무슨 커피 머신을 설명하는 사람 같았다. "시간관리국에 온 걸 환영해요."               p.14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정부는 시간을 넘나들어 이동하는 수단을 개발했지만, 그것이 아직 상용화된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시간관리국'을 설립해 과거에서 넘어온 '이주자'를 관찰하며 연구 중이다. 역사의 경로를 바꿔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이주자'들은 역사에 남은 큰 전쟁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따위의 현장에서 원래라면 죽을 목숨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1665년 페스트가 런던을 휩쓴 대역병 시대에서, 1645년 네이즈비 전투 현장에서, 1916년 솜 전투에서, 프랑드 대혁명 시기인 1793년에서, 그리고 1847년 북극탐험 현장에서 각각 이주자들이 현재로 온다. 과거에서 온 그들은 미래에서 살아가야 했기에 감시원이 늘 곁에 붙어 있으면서 그들을 안전한 삶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러한 감시원을 '가교'라 칭했고, 이야기는 국방부 언어 담당부서에서 통역사로 일하다 가교가 된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해군 장교와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가 현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1845년에서 추출된 그레이엄 고어는 여성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매우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영국 젠틀맨이자 지독한 애연가이기도 하다. 그는 북극 탐험 중 고립되어 죽을 뻔했다가 현대로 오게 된 케이스였다. 그는 폐렴과 심한 동상, 괴혈병 초기 증세, 부러진 발가락 등을 치료받았다. 그리고 시간관리국 병동에서 세 번이나 탈출하려 했던 적이 있고, 반항을 멈추고 나서는 오히려 이주자 중 가장 높은 적응 수준을 보이고 있다. 모든 이주자는 일 년 동안 가교와 함께 지내도록 했다. 세탁기와 가스레인지, 라디오, 진공청소기 따위에 관해 설명을 들은 뒤 "당신네는 번개의 힘까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러고는 단지 하인을 고용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 힘을 사용하는군요."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고어가 현대문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과연 19세기의 신사와 21세기의 공무원,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어떻게 진행될까. 




인생이란 문을 쾅 닫는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날마다 돌이키지 못할 결정을 내린다. 고작 십이 초 늦은 지각 때문에,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삶은 느닷없이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만약 시멜리아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면, 또는 퀜틴에 대한 의심을 덜 품었다면 내가 가교였던 해의 겨울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내 손으로 그레이엄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는 감히 곰곰이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p.258


자, 여기 과거에서 갑작스럽게 현대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들이 있다. 길게는 361년 전에서, 짧게는 110년 전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21세기에 무사히 적응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에서 온 사람과 1년 365일 24시간 내내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서로 작성하면서,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민자들은 무사히 현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오로지 건물과 사람들로 지평선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고, 여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숨을 쉬는 거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마음이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시대가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이주자와 가교가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관리국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과연 시간 여행에 숨겨진 정부의 음모는 뭘까. 애초에 이 극비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펭귄 클래식에서 일하는 작가 캘리엔 브래들리의 장편 데뷔작이다. SF적인 설정을 블랙코미디와 로맨스로 가볍게 풀어 나가다가 흡입력있는 스파이 스릴러로 마무리되는 페이지터너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읽었다. 이런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시간여행을 통해 현대에 오게 된 사람들을 '난민'으로 대하는 것이나, 이민자 가정 출신의 화자를 통해 그들을 적응시킨다는 설정, 문화적 맥락이 부재하는 자리에 순진무구한 풋풋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색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두 사람의 로맨스도 재미있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스릴 넘치는 스토리도 탄탄하게 흘러간다. 몇 줄의 기록과 낡은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 있던 실존 인물에 상상력을 더해 캐릭터로 탄생시킨 것과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서사를 만들어 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게다가 일단 너무 재미있다. 현재 6부작 드라마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영상화된 버전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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