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원 일기 - 나무와 꽃을 돌보며 발견한 자연의 질서와 조용한 위안
김민호 지음 / 판미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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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잎을 내느라 사철나무는 누렇게 하엽을 낸다. 피는 것과 지는 것이 나란히 있어 정원은 결국 균형을 찾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옇게 일어나는 일상의 고민들이 씻겨 내려가기를. 지나갈 것들은 지나가고 남아야 할 것만이 남아 있기를. 봄비에 살짝 젖어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한 잔디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대고 잡초를 뽑는다. 가끔 울새의 우는 소리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정원은 조용하기만 하다. 차곡차곡 봄이 쌓인다.                p.26


런던이라는 낯선 땅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식물들로부터 받은 위로와 기쁨을 담고 있는 책이다. 15년 전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 저자는 영국 왕립원예학회의 정원사 자격증 과정을 시작해 수료하고, 정원 회사에서 실무 경력을 쌓은 뒤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야생화 꽃씨를 담고, 정성스레 소개글을 작성해 집집마다 전단지 돌리기를 200여 장, 그렇게 정원사로서의 시간이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민호이고 정원사입니다.... 이 작은 봉투에는 양귀비와 수레국화 같은 야생화 씨앗이 있습니다. 흔하지만 예쁜 꽃들입니다. 정원 한구석에 뿌려져 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전단지 전문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정원이 있는 집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그 정원사를 꼭 만나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나누어 열두 달의 기록을 담았다. 3월에는 버터컵, 4월에는 클레마티스, 5월은 작약... 이런 식으로 매달 중심이 되는 식물 이야기를 들려 준다. 저자가 직접 그리고 찍은 정원 도면과 흑백 손그림, 사진들이 빼곡히 수록되어 있어 페이지마다 달큼한 흙내와 풀내음이 나는 듯한 책이었다. 계절을 따라 펼쳐지는 정원사의 일상은 식물을 다루는 그 어떤 책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는 말한다. 진짜 이야기는 꿈을 이룬 뒤에 더 고요하고 진득한 방식으로 흐른다고. 정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말이다. 손톱 밑 흙때는 씻기지 않고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이며, 모자를 써도 입 주변에는 종일 해가 닿아 검은깨 같은 점이 늘어나고, 퇴비를 짊어진 봄날의 오른쪽 어깨에는 구수한 퇴비 냄새가 배는 것이 정원사의 실제 일상이다. 그저 예쁜 꽃들과 초록의 나무들에 둘러 싸여 있는 멋진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정원사의 진짜 일에 대해 알 수 있어 정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가지마다 묻어 있는 나무의 시간을 읽고, 이렇게 자라야만 했던 이유와 노력을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나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의 시선을 옮긴다. 뿌리를 내린 이 자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거기 자라고 있는 나무일 테니까. 해가 뜨고 지는 방향, 작년 여름 매섭게 바람이 불던 날, 초봄 예기치 않게 내렸던 늦서리...... 모든 기억이 가지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아무리 날이 선 전지가위를 들고 있다고 한들, 그 시간들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가지치기는 그저 깊이 없이 허둥대는 얕은 노동일 뿐이다.             p.281


런던은 크고 작은 정원이 딸린 주거 형태가 흔한 편이라, 집 밖의 조그만 땅에서 이것저것 심고 가꾸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거주 비중이 높아서 해외에 비해 정원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편이라 정원을 가꾸며 사는 것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로망같은 거였다. 정원을 꿈꾸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아 포기영국정원일기, 김민호, 판미동, 에세이, 영국정원사, 정원하고 대신 집에서 소소하게 식물을 키우며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정원에 대한 로망을 대리 만족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정원을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지, 계절마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가지치기와 비료를 주는지 저자의 글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정원을 가지게 된다면, 꼭 이렇게 해봐야겠다 싶었을 만큼 유용한 정보들이 많았다. 



워낙 식물을 좋아하고, 정원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모든 에피소드들이 다 재미있었지만, 겨울 중에서 1월에 대한 글이 뭉클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가지마다 묻어 있는 나무의 시간을 읽고, 이렇게 자라야만 했던 이유와 노력을 이해하려 한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지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나무의 시간들까지 헤아리는 정원사라니... 이런 사람이 가꾸는 정원이라면 정말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정원을 맡긴 영국의 집주인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식물들이 매 순간 해야 하는 일들을 조용함 속에서 해내는 그 단단함에 불완전한 마음을 기댈 수 있었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느리지만 섬세한 시선으로, 자연의 단단한 리듬에 맞춰 삶을 바라보는 책이라 지친 하루의 끝에서 위로받고 싶은 순간에 힘이 되어줄 것 같다. 런던의 한국인 정원사가 전하는 정직하고, 다정한 위로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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