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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원래 사는 게 연기에 가까운 거라고 일러주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듬뿍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여사는 자신이 연기를 아주 지독하게 못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매번 사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너희는 말이야. 지금 혼란스럽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돼." p.107
이중일은 어릴 때부터 경찰관이나 소방관을 꿈꿨지만, 지방의 응급구조학과를 나와 여섯 번째 고시에 실패하면서 노력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은 사설 구급대원으로 일하며 온갖 환자를 대형 병원으로, 요양 병원으로, 정신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사설 구급차를 타려는 사람들은 아주 절실했고 치열했기 때문에, 그런 환자와 보호자들을 이송하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대하거나, 싸움을 중재하며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현장에 있다가 집에 오면 모든 게 허무했다. 잔뜩 사다 놓은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웠고, 별다른 취미도 없어 통장에는 푼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가끔 절연한 부모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의 이상한 평화에 만족했다.
그날도 환자와 보호자를 이송하는 일을 하는 중이었고, 두 사람은 기필코 휴게소에 들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가 통증이 심해 공황 증세를 보인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들은 휴게소에서 잎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었고, 그는 놀라 아연실색해 그들에게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 얘기를 듣다 보니 보호자가 환자의 차를 10년 넘게 몰았다고, 구급차를 몰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다 그들에게 구급차를 빼앗기게 되는데, 어쩌다 보니 도망치려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휘말려 구급차를 자신의 의지로 내어주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완벽하게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중일은 환자의 탈출에 공범이 되기로 한 걸까.
그리고 근정에게 물었다. 너는 이 모든 게 진심인 거냐고. 근정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는 보통 이런 걸 진심이라고 하지 않아? 근정의 물음은 너무나 간결했고, 그래서인지 더욱 명백하게 느껴졌다. 문주는 도대체 이런 걸 진심이 아니면 무엇을 진심이라 하겠느냐고, 응당 그렇게 생각하고자 하면서도 자꾸 미심쩍었다. 또한 자신이 그 미심쩍은 마음을 결코 지울 수 없다 는 것이 너무 의아했다. p.282~283
함께 사는 가족이든, 영원을 약속한 연인이든, 뭐든 해주고 싶은 친구이든, 믿고 의지되는 동료이든 간에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대를 믿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소연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한패가 되고 마는 사람들이 나온다.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마 관계를 끊지는 못하며, 상대의 말에 불만과 분열을 경험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그의 편에 서기로 한다. 어딘가 수상하고 불가피해 보이는 이들의 연대를 우리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돌보는 행동이 되고, 누군가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결정하는 것이 결국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극중 시터로서 극진하게 할머니들을 돌보는 희지에게 한 보호자가 한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적이 나 역시 있었기에 마냥 소설 속 이야기 같지 않게 느껴졌다. 동시대의 가장 최전선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소연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