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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나고 찢긴, - 여성 바디호러 앤솔러지
조이스 캐롤 오츠 외 지음, 신윤경 엮음 / 문학수첩 / 2026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미 묻혀버린 꿈이 죽은 자의 뒤를 따라오는 저주처럼 되살아나는 수도 있나 보다. 모니크는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고 열렬히 붙잡고 싶으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의 꿈마저 삼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삼켜버린 그 꿈은 반대로 그녀를 삼킬 수도 있었다. - 타나나리브 듀, '댄스' 중에서, p.63
뉴욕 미술 대학에 다니는 중인 라라는 졸업 프로젝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도 조소 작업실에는 커다란 점토 덩어리가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최근 몇 달 사이 라라의 작품은 어둡고 기되해졌다. 이유는 시도때도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네 재능은 네 안에 있어. 네 안 깊은 곳에.'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기도 하고 일하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녀를 부르고 유혹하는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도 1년이나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경련이 나는 것 같은 통증이 몇 분 정도 이어지다 사라지곤 했다. 급기야 배가 조금씩 부풀기 시작해, 라라는 산부인과에 진료를 받으러 간다.

의사는 내출혈이 상당량 발견되었다고 말하며, 출혈의 원인이 난소 바깥쪽에 있는 덩어리라고 했다. 그 덩어리의 정체는 놀랍게도, 쌍둥이의 잔재라고 했다. 그녀가 아기였을 때 일부만 몸에 흡수되었을 거라고, 그것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두명 작기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히거나, 생명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쌍둥이 자매가 몸 안에서 살고 있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의사는 태아 내 태아라고 부르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100만분의 1정도라고 말한다. 라라는 자신이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가 바로 그 쌍둥이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쌍둥이 자매에게 말레나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이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는 존재인 말레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라라는 어느새 그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다. 자, 오싹한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될까.

생각하지 말고, 기억하지도 마라. 활자가 인쇄된 종이들...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지 마라. 당신이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는 잘못된 것이다. 여자아이는 책이 필요 없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아이는 더욱 그렇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여성에게 해롭다. - 조이스 캐럴 오츠, '평온의 의자' 중에서, p.289
한 젊은 여성은 자기 몸에서 자라난 이상한 돌기로 자신만의 작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낸다. 한 여성 조각가는 자기 몸속에서 자라난 ‘쌍둥이'와 맞서 싸우고, 교묘한 방식으로 인종을 차별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창작 예술가이자 흑인인 한 여성의 투쟁도 처절하게 펼쳐진다.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건 타나나리브 듀의 〈댄스〉라는 작품이었다. 생의 절반을 병약한 할머니를 돌보는 데 바친 헌신적인 마흔 살의 여성 모니크는 갑작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고, 해방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춤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거다. 마치 동화 빨간구두 속 카렌처럼 말이다. 무릎은 발작을 일으키듯 운전대에 부딪혔고, 발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사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인종 문제로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는데 그 영혼이 마치 저주처럼 그녀의 몸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게 한 것이다. 이미 묻혀버린 꿈이 죽은 자의 뒤를 따라오는 저주처럼 되살아날 수도 있는 걸까. 할머니의 사라진 꿈은 모니크를 어디로 이끄는 걸까. 비명을 질러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녀의 춤은 과연 멈춰질 수 있을까.

조이스 캐럴 오츠가 기획·편집하고 참여한 이 작품은 여성의 몸에 대한 왜곡과 집착을 바디호러라는 장르로 해부한 앤솔러지다. 마거릿 애트우드, 에이미 벤더, 메건 애벗, 리사 터틀, 엘리자베스 핸드 등 15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국내에 작품이 출간된 작가들도 있지만,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들도 다수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신화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육체에 투영된 가학과 편견을 다시 써 내려가는 작품들이라 오싹한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있고, 섬뜩한 공포물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성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강제적 침입에 취약하고, 수정과 반복되는 임신에 노출된 여성의 몸에 대한 사유가 각각의 이야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로렐 하우슬러의 음산하고 불길한 삽화들도 이야기만큼이나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엮은이 서문에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그 안에는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요한 속박에 반항하며 맞서는 맥박'이 고동친다고 말했다. 이 서문은 9페이지에 달하는데, 각각의 작품에 대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개도 만날 수 있어 책을 읽기 전에 좋은 가이드가 되어준다.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그려낸 독특하고, 강렬한 바디호러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