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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스크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잠시나마 주변 세계와 서로에게 나란히 맞닿아 있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다미라는 자신이 돌보던 느리지만 우아한 코끼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녀가 구 아르바트 거리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었다. 개체수는 멸종을 향해 달려가고 모든 죽음은 찢어진 구멍으로 세상에 남았다. p.37
다미라 박사는 코끼리 행동 연구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코끼리들을 지키기 위해 밀렵꾼들과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한 세기가 흐른 뒤 코끼리들은 모두 멸종해 전부 사라져버렸다. 과학자들은 멸종 생물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미라로 만든 표본에서 DNA를 사용해 '복원 매머드'를 탄생시킨다. 국립 보호구역을 만들어 매머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번식하고, 어쩌면 잃어버린 생태계를 다시 설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매머드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매머드들은 풀어놓기만 하면 혼란스러운 상태로 돌아다니며, 무리를 짓는데 실패하고, 불필요하게 서로를 다치게 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열세 마리를 잃었고, 더는 야생에서 새끼가 태어나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매머드들을 구하는 걸 도와달라고, 다미라 박사의 기억을 소환한다. 코끼리 문화를 아는 유일한 존재인 다미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매머드는 그냥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인간들 때문에 멸종으로 내몰린 거다. 현존하는 다른 모두 거대 동물처럼. 멸종의 원인은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인간의 탐욕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다미라였다. 과학자들은 다미라의 의식이 암컷 우두머리가 되어 매머드 무리를 이끌어 주기를 바랬다. 그렇게 복원 매머드의 몸에 이식된 채 되살아난 다미라의 의식체는 그들에게 매머드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그들에게 분노와 복수라는 감정을 가르친다. 인간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가 평화 대신 전쟁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소년이 저질러온 죄의 냄새.
...복수. 다미라가 무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들은 이 소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땅에 마구 문지르고 더는 인간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밟아 뭉개버릴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
소년이 연루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었다. 코욘을 위해. 예케낫을 위해. p.152
여기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피 냄새를 풍기며 총을 쏘고, 무고한 생명을 해쳐 탐욕을 채우려는 인간과 공감할 줄 알고 용감하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는 인간. 자, 포식자로서의 인간과 수호자로서의 인간, 당신은 어느 쪽인가. 놀라운 데뷔작 <바닷속의 산>을 썼던 레이 네일러의 신작이다. 전작에서 언어에 대해서, 소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사로 그려냈었다면, 2025 휴고상을 수상한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의 탐욕을 보다 밀도 높은 서사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오백페이지가 넘는 전작에 비해 분량은 반도 안 되지만, 더 아름답고, 더 깊고, 집요하다.
레이 네일러는 데뷔작인 <바닷속의 산>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작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 소설인 <터스크>로
2025 휴고상을 수상했다. SF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과학 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던 전작이 너무 좋았기에, 이번 신작도 굉장히 기대하며 읽었다. 전 세계적 멸종 위기종인 코끼리의 엄니를 얻기 위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 행태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이 작품은 레이 네일러 특유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필치로 느리고 장엄하게 흘러간다. 멸종된 고대 생물 매머드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란, 더 없이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니 매머드 무리가 인간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코끼리와 코뿔소를 밀렵하고, 상아와 뿔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학살당하는 동물들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경이로움을 다루어 인류가 진정 '복원'해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걸 바로잡으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만큼이나 이 지구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