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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을 위한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미국 이외의 세상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솔직히 미국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반쪽 역사라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쪽은 그동안 망각했던 나머지 반쪽의 역사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 독일 같은 <메이저> 이외에 많은 <마이너> 국가도 전쟁의 한 축을 맡았다. p.23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며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였기에, 세계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예측 불허인 푸틴은 80여 전 스탈린이 그랬듯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들이 무차별 폭격을 당했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잇따랐다. 그때만 해도 우크라이나가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 아니라 화근을 자초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어리석에 잘못이 있다고 미국과 서방은 생각했다. 하지만, 단 사흘이면 푸틴의 승리로 끝날거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지도자인 젤렌스키는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 벌어진 미국 이란 전쟁도 누가 이길지 뻔하지만, 장기화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동서고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은 약소국의 공통된 숙명이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국가 간의 온갖 모략과 암투가 있었던 때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 외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특히 인류 최악의 전쟁이라는 제2차 세계 대전은 서구 열강과 약소국들의 민낯을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전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제2차 세계 대전은 강대국을 위한 역사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 <더 퍼시픽> 등의 블록버스터 영화뿐만 아니라 시중에 나와 있는 주요 도서들 모두 주요 강대국들의 서사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영국, 소련, 독일 외에도 수많은 약소국들이 전쟁의 한 축이었다. 약소국이라고 해서 마냥 무력한 존재도 아니었고, 강대국들이 쓰다 버리는 장기판의 졸도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약소국들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떻게 싸웠는지 그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역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는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였다. 문제는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지였다. 1918년에 불가리아의 항복을 시작으로 동맹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히틀러는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시도한 이탈리아와 헝가리에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러 본보기로 삼았다. 불가리아는 진작부터 중립국인 스위스와 튀르키예를 통해 연합국과 은밀하게 협상을 탕진하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조금이라도 낌새를 눈치챈다면 결단코 내버려둘 리 없었다. p.900
저자는 수많은 세계사 관련 책을 써왔고, 개인 블로그인 <팬더 아빠의 전쟁사 이야기>를 통해 마이너한 전쟁사를 틈틈이 쓰고 있다. 그는 '강자의 이야기만으로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나머지 세계;를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다시 들여다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란 거대한 싸움을 승패라는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여러 국가의 충돌로 발생한 연쇄적이고 다중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전쟁을 주도한 강대국이 아니라,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제2차 세계 대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현장감 있는 사진과 세력권 지도, 전쟁의 흐름을 보여 주는 자료들로 가득한 이 책은 976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로 읽기 전부터 압도감을 준다. 분량이 많은 것만큼 담고 있는 이야기도 밀도 높은 서사라 차근차근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약소국들은 전쟁을 시작하지도,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지도 못하지만, 그 결과는 가장 먼저, 제일 무겁게 떠안아야 한다. 승자의 서사에 가려져 있던 약소국들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전쟁의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세계 2위의 군사 대국인 러시아를 상대로 4년이나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이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꼭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전쟁사라는 것이 결코 읽기 수월한 텍스트는 아니지만, 이 책은 약소국이 처했던 지정학적 위치와 세력 구도를 지도로 정리하여, 각 전선의 이동과 국가 간 역학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보다 입체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세계사, 지금 바로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