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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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게 상상력의 힘이야, 그는 속으로 말한다. 아니, 그냥 간단하게, 꿈의 힘. 사람이 허구의 작품에서 전개되는 가상의 사건으로 인해 변화를 겪을 수 있듯이 바움가트너는 꿈에서 자신에게 스스로 해준 이야기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이제 창 없던 방에 창이 생겼다면, 누가 알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창살도 사라져 마침내 바깥공기 속으로 기어 나갈 수 있는 날이 올지.              p.80


폴 오스터 생애 마지막 작품인 <바움가트너>가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책을 가제본으로 읽었기에 아름다운 본책을 소장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더 예쁜 버전으로 만날 수 있어 리커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기존 버전의 표지도 함께 판매되고 있는데, 주인공 바움가트너와 그의 아내 애나 버전으로 두 버전을 함께 두면 마치 세트처럼 느껴지니 둘다 소장해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나온 특별판에는 김연수 작가의 헌정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20대 중반에 처음 읽었던 <뉴욕 3부작>부터 폴 오스터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사적이고도 각별한 애도가 담긴 글이라 너무 좋았다. 


10년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노교수 바움가트너는 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30년 이상 함깨 했던 애나는 그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남겨진 이는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아주 좋은 봄날 아침이었다. 바움가트너는 서재에서 글을 쓰다 필요한 책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엌에서 나는 냄새에 가보니 아침으로 먹을 달걀을 삶던 냄비가 타버렸고, 그걸 들어올리려다 손을 데고 만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던 플로레스 부인의 딸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다쳐 어머니가 일을 못가게 되었다고 울먹이고, 바움가트너는 어린 소녀를 달래주느라 10분이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전기 회사의 계량기 검침원을 지하실로 안내하다 헛딛는 바람에 무릎과 팔꿈치를 다친다. 이상한 사건 사고로 얼룩진 그날, 통증과 피로로 인한 안개 속에서 시커메진 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에게 <그때>라는 사라진 세계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제 세부적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 피크닉 점심을 먹었던 일, 모래가 많은 땅에 담요를 펼치고 애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건너다보았던 일은 떠오른다.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p.242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수도, 예상치 못했던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삶이지만, 우리가 그 모든 일에 미리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맞이하게 되는 기쁨과 생각지도 못했던 비극에 망치로 두들겨 맞아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절망이 공존하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상실'과 기억' 또한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온다. 냄비가 그을리고, 그가 층계에서 굴러 떨어지던 날 견고하게 묻어 두었던 과거에 금이 가고 쪼개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대학원 1학년생이던 때부터,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고 이후 함께한 40년간의 세월,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양장점 주인이자 실패한 혁명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이르기까지.... 한 인물의 내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아내가 평생 써왔으나 한 번도 발표한 적 없던 글들과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이 그의 내적인 여정과 긴밀하고도 자연스럽게 뒤얽히면서 그는 비로소 과거를 두려움 없이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은 〈정원사〉라는 뜻을 가진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10년 째 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30년 이상 함께 했던 애나는 그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남겨진 이는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허구와 환상을 넘나들며 한 사람의 삶을 차곡차곡 그려나간다. 삶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70년이 넘는 인생 가운데 마지막 2년 정도라는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읽다 보면 생애 전체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삶은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헤어지고,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바움가트너는 기억의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얽혀 있는 삶의 조각들을 그러 모은다. 특히나 이 작품은 폴 오스터가 죽음을 앞두고 써낸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절실하고도 감동적이다.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밀도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상실과 기억에 관한 아름다운 사유를 보여준다. 폴 오스터의 빛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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