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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 - 미국인의 회고록
키에스 레이먼 지음, 장주연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늘 굽고 휘어진 채 웃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책에 둘러싸여 살아온, 흑인 남부의 그런 가족이었습니다. 그 많은 책들, 그 웃음들, 그 거짓말들, 그리고 내가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고쳐야 한다고 당신이 끊임없이 말해준 덕분에, 나는 문장, 문단, 쉼표, 여백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도, 쉽게 감탄하지도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은 내게 글을 실험할 수 있는 흑인 남부의 실험실을 만들어줬습니다. 그 안에서 나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순간마다, 기억과 상상력을 조립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p.31~32
1학년때는 104킬로그램, 대학생이 되어서는 132킬로그램을 넘겼고, 곧 140킬로그램이 되었다. 이는 미국에서 흑인 남성으로서 살아가는데 결코 평범한 무게는 아니었다. ‘헤비(Heavy)’라는 제목은 작가가 짊어져야 했던 몸의 무게이자, 그 몸에 새겨진 상처와 억압의 총합이다. 현대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인 키에스 레이먼은 자신의 몸을 사회적 억압과 내면의 상처가 교차하는 장소로 드러낸다. 이 책은 독특한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1인칭과 2인칭 서술이 함께 진행된다. 2인칭 서술은 자신의 어머니를 향하고 있다.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학대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는 사랑과 통제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사회적 맥락으로 읽어 낸다. 인종, 계급, 정체성, 그리고 흑인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억압과 가족사의 무게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읽으며 개인의 상처가 어떻게 사회의 문제와 이어지는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실 저탄수화물 식단, 제한된 설탕 섭취, 웨이트 트레이닝, 그리고 위고비 등의 다이어트 보조제는 백인 미국인들 혹은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에게 허락된 것이다. 저자는 '흑인들로 하여금 몸에 해로운 음식을 갈망하게 만든 욕망'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실제로 저소득층의 비만율이 고소득층보다 훨씬 더 높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그 '무게'가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버텨내야 하는 삶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걸까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들은 종종 있었다. 리즈 무어의 <무게: 어느 은둔자의 고백>,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침대>, 장용민의 <궁극의 아이> 등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먹는 행위를 통해서만 위안을 얻었고,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헤비>의 저자는 이들처럼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거나, 스스로를 내면 속으로 가둬두는 대신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물론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학교에서 배운 어떤 것도 미시시피, 메릴랜드, 그리고 미국 전역에 만연한 폭력이 이토록 영구적이라는 걸 설명해주지 못했습니다. 방과후, 나는 내 글에 쓰인 단어들을 읽고 재배열하며, 폭력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며, 진실을 찾아내려면 단어를 다시 읽고 재배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단어를 고치고 배열하는 데에는 어휘뿐 아니라 의지와, 어쩌면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고쳐 쓴 단어 패턴은 곧 고쳐 쓴 사고방식이고, 고쳐 쓴 사고방식은 기억을 형성하니까요. p.148
키에스 레이먼은 미시시피주립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현재 텍사스 라이스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연약함과 실패를 언어로 표현하며, 그것을 인정하며 비로소 온전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완벽한 문장만이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흑인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이라 믿었다. 그래서 붉은 펜으로 아들의 글을 가차 없이 수정하며 완벽을 강요했는데, 그는 오히려 어머니가 물려준 그 날카로운 도구로, 오히려 가장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파헤친다. "읽기, 다시 읽기, 쓰기, 고쳐 쓰기. 이 네 가지를 당신이 내게 선물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30년 전, 할머니의 현관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그는 어머니를 향해 말한다. 다른 모든 미국 아이들처럼, 나도 당신에게 잔혹하리만큼 솔직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다른 모든 미국 부모들처럼, 당신도 나에게 그랬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고 말이다.
이 책은 유년 시절의 성적 학대, 어머니의 도박 문제, 인종차별과 과체중이라는 물리적 무게까지... 모든 ‘헤비’한 진실들을 ‘고쳐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해부하고 재구성한다. 그렇게 이 책은 개인의 고백을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가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를 고발하는 서사로 확장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뛰어난 것은 탁월한 문장력과 사유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생존 기술로 가르친 ‘고쳐 쓰기(revision)’가 작문 기술을 넘어, 자신의 삶과 관계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는 행위와 연결되었으니 말이다. 평생에 걸쳐 변화해온 그의 '무게'에 관해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듣게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모든 주제는 그의 '몸'을 통해 구체화되고 증언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는 거짓말을 쓰고 싶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한다. 누구나 진실을 회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부끄러움이든 과거의 폭력을 되살리는 일이든 진실을 기록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으로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을 쓰고 싶은 충동을 진실의 문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이 책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인상깊게 읽었다면, 이 작품 또한 꼭 읽어 보길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