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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세계에 사는 다른 자들. 아마 그들조차 그를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트리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와요와요인 모두 그가 섬을 떠난 걸 알고 있다. 단지 애써 그를 잊으려,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아트리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세계보다 더 큰 세계에 갇혀 침묵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 것 같았다. 어째서 내가 이런 형벌을 감당해야 하지? p.55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와요와요 섬은 대륙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와요와요 섬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밀물과 썰물에 맞춰 바다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얻었다. 섬은 크지 않았다. 보통 사람 걸음으로 아침 먹을 때 출발하면 점심 먹을 무렵이 조금 지나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정도였다. 섬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제사를 지낼 때는 바다를 향하고, 밥을 먹을 때와 사랑을 나눌 때는 바다를 등졌다. 카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곳에는 기이한 전통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태어나서 백팔십 번째 보름달이 들 때 돌아올 수 없는 항해를 떠나야 한다는 거였다. 스스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 다시 섬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와요와요의 율법이었다. 지나친 풍요는 탐욕을 부르고, 탐욕은 와요와요의 신 ‘카방’을 진노케 하므로 한 가족마다 남자는 딱 한 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남으로 태어난 소년 아트리에는 그렇게 섬을 떠나 바다에 표류한지 일주일 만에 식수와 식량을 모두 잃는다. 물이 차오르는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아트리에는 낯선 섬에 좌초된다. 섬 주위로 바다 생물의 사체가 가득해 섬 전체가 바다에 뜬 거대한 감옥 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트리에는 집을 만들고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혼자 있다는 적막함이 그를 지치게 했다. 그 섬에는 말을 걸어줄 사람도, 그의 헤엄 기술을 칭찬해주는 사람도, 그와 싸우거나 잠수 대결을 벌일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 위에 또 그림을 그리고, 비에 젖어 지워지면 새 그림을 그리며 아트리에는 섬 곳곳을 분주히 돌아다닌다. 이야기는 와요와요라는 비문명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소년 아트리에와, 타이완의 문명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 ‘앨리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문자도 없는 비문명의 세계인 와요와요와 끝없이 개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도시의 풍경이 대비를 이루며 그려지고, 그들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쌓이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짊어진 이들의 삶이 점점 모자이크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구냐고?” 복안인의 손에 있는 번데기가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은하계 하나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막 탄생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석영이 박힌 듯 반짝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정말로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겹눈 속 수많은 홑눈이 바늘 끝보다 가늘고,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지켜볼 수만 있을 뿐, 개입할 수 없는 것이 내 유일한 존재 이유지." 복안인이 자기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p.374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 우밍이의 신작이다. <도둑맞은 자전거>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었는데, 사라진 자전거의 행방을 쫓으며 아버지의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여정을 주요 서사로 두고 식민 시대의 역사와 전쟁 등 대만 100년사가 함께 펼쳐지는 묵직한 이야기였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태평양 한가운데에 뜬 거대한 쓰레기 섬을 모티프로 생태 위기를 우화적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산 제물과 여섯 번째 발가락, 인어다리증 태아, 곤충의 눈, 즉 ‘복안’을 가진 초월적 존재 등 신화와 환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이다. 종말이 가까워진 근미래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지만, 특유의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인 작품이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잔상이 여운처럼 남는 시간이었다.
우밍이는 작가이자 환경운동가로도 유명한데,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의 주요 서식지에 초대형 석유 화학 단지를 건립하겠다는 타이완 정부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 결국 사업은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위성 사진으로 처음 확인된 ‘쓰레기 소용돌이’에 관한 기사를 접했고, 그것이 이 작품 <복안인>의 출발점이 된다. 극중 미스터리한 존재인 '복안인'은 곤충처럼 여러 겹의 눈을 가지고 수만 가지 풍광과 무수한 장면들을 동시에 바라본다. 이 작품 역시 하나의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세계들이 포개지고, 겹치며 만들어 지는 겹눈을 통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정말로 열려 있느냐 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을 통해 겹눈 속 수만 가지의 형형한 풍경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가 어느덧 일상이 되어 버린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작품 속 쓰레기 섬은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복안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존재들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