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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지음, 크리스 리델 그림, 김선희 옮김 / 김영사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앨리스는 부채와 장갑을 주워 들었어요. 복도가 너무 더웠기에 부채질하면서 혼잣말을 했어요.
"정말이지 오늘은 모든 게 다 희한하네! 어제는 평소와 똑같았는데. 밤새 내가 바뀌었나? 생각을 좀 해 보자.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내가 그대로였던가? 살짝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만약 내가 달라졌다면 그 다음 문제는 도대체 내가 누구로 바뀌었냐는 거야. 아, 엄청난 미스터리인걸!" p.52
수없이 변주되는 고전 중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여러 판본으로 만나본 책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만난 버전은 고전의 클래식함과 현대의 재해석이 만나 정말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특별 일러스트판은 160년 전 초판을 발행했던 영국 맥밀란 출판사가 삽화가 ‘존 테니얼’의 탄생 200주기를 기념하며 기획한 것으로, 현시대 가장 주목받는 일러스트레이터자 ‘케이트 그리너웨이 메달 3회 수상’이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의 소유자 ‘크리스 리델’이 참여했다. 흑백과 컬러 일러스트가 골고루 160장 이상이 수록되어 있어 소장용으로도 정말 근사한 버전이다.

사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초현실적이고 분위기에 기발한 은유와 언어유희, 수학적 논리와 이해하기 힘든 전개 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그 초현실적인 부분이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해 유독 다양한 버전의 일러스트판이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토끼굴에 빠져 모험을 시작하게 된 앨리스는 몸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자신이 흘린 눈물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여러 동물들을 만난다. 몸통 없이 웃는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체셔 고양이, 카드 몸집을 한 병사들과 시종일관 '저놈의 목을 쳐라'고 외치는 여왕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매력 또한 각각의 일러스트 버전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왔다.
그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 덕분에 일러스트 버전이 완전히 다르게, 끊이지 않고 변주되어 나오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서 이미 여러 번 읽어서 전부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매번 다른 버전으로 만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공작의 말에 앨리스가 자그맣게 속삭였어요.
"누가 그랬는데 세상은 모두가 제 일만 신경 쓰면 잘 돌아간대요!"
"아, 그렇지! 거의 같은 뜻이야!"
공작이 앨리스의 어깨에 뾰족한 턱을 파묻으며 덧붙였어요.
"그리고 이 말에 대한 교훈은 '미세한 느낌에 신경 써라, 감각이 풍부해질 것이니('잔돈을 아껴라. 티끌 모아 태산이니'라는 속담을 활용한 말장난_옮긴이)'." p.228
앨리스는 자매들과 강둑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그림도 대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대체 어디에 쓴담?'이라고 생각하며 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지꽃을 껑어 목걸이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분홍색 눈의 하얀 토끼가 혼잣말을 하며 옆으로 휙 지나가는 게 아닌가. 주머니 달린 조끼를 입은 토끼도, 시계를 꺼내는 토끼도 본 적이 없었던 앨리스는 호기심이 불타올라 토끼를 쫓아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간다. 옷을 입고 말을 하는 토끼를 보고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아 ㄶ고, 망설임 없이 굴속으로 따라 갈 수 있었던 앨리스의 호기심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깊은 우물처럼 아래로 한참을 떨어져 도착한 그곳에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 속 모험을 하게 된다. 병에 든 음료를 마시면 몸이 작아지고, 컵케이크를 먹으면 몸이 커지는 경험을 시작으로 티타임 중인 모자 장수와 3월 토끼를 만나고 겨울잠쥐와 언제나 웃는 체셔 고양이를 만난다. 고약하고 제멋대로인 하트 여왕 등 등장하는 이들마다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을 지닌, 상식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지만 말이다. 논리와 상식이 뒤집어지는 일들만 계속 이어지니, 이상한 것이 정상이 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앨리스는 지루할 틈 없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하얀 토끼가 보이면 따라가야 한다.'는 문장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고, 호기심을 주체 하지 못하는 것이 어린 시절의 특권이라면 우리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어른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만은 다시 호기심 넘치고, 상상력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크리스 리델은 주인공 앨리스를 상상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루이스 캐럴이 찍인 리델 자매의 사진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았다고 한다. 사진 속 앨리스 리델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재탄생한 앨리스이기에, 그 동안 만나왔던 어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도 다른 주인공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앨리스의 표정이 너무 실감나서 더 공감하며 읽게 되었다. 정말 생생한, 진짜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앨리스가 궁금하다면 이번에 나온 버전으로 꼭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자, 한때 넘쳐 나는 상상력을 주체하지 못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면,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색다른 모험을 떠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