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9
허진희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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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있음'과 '없음'에 무덤덤한 사람이지만 '있다가 없음'에는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처음 알게 되었죠. 보하는 내게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는 존재였어요. 지금은 내 곁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있지만 언제고 예고 없이 휙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존재.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보하만의 성질이었지요. 그 성질은 나를 속절없이 유약하게 만들었고요.             p.63~64


처음 만났을 때 절대 친해질 수 없으리라 믿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친해지게 될 거라고 믿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한 눈에 알아본, 나와 결이 딱 맞는 상대와 대부분 가까워지는 편이었다. 함께 만났던 사람들 모두와 서서히 멀어진 뒤에도, 단짝 친구가 되어 그날을 돌아 보았다. 이 작품은 그렇게 한때 삶의 전부이기도 했던 친구에 대해, 그 시절 우정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다. 아홉살 구니는 빨간 애나멜 구두를 신고 온 보하를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지만,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와 나의 세계에 교차점이 없을 거라는 직감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다른 두 소녀의 우정은 급작스럽게 시작된다. 


막 열여섯이 되던 겨울, 보하의 아빠가 회사 돈을 횡령하고 감옥에 수감되면서 보하네 집은 허무하게 마 ㅇ해버렸다. 삶은 곧바로 궁금해졌다.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아주 빠르게. 그리고 그 변화는 원치 않는 이별을 불러온다. 보하가 엄마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생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구니는 할머니의 기원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해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스무 살 여름, 세상의 전부였던, 그러나 자신이 차갑게 배반하고 만 할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이제 보니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세상에 단 한 명 남은 것은 보하 뿐이었다. 보하는 집안형편으로 고등학교를 그만뒀었기에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공부를 시작한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보하는 구니와 같은 대학을 다니겠다고 수능 공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시험을 준비한다. 그 시간은 서로에게 각자 다른 이유로 간절했다. 유독 추웠던 그해 수능 날, 구니는 보하가 시험을 치르는 학교 교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지만, 보하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은 보하는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일에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린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할머니는 보하가 나랑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거였어요. 내게 위협이 될 만큼 다른 사람이라고. 그건 내가 보하를 처음 본 날, 보하와 절대로 친해질 리 없다고 믿었던 것과 비슷한 유의 감각이었겠죠. 내가 무시하고 말았던 직감 말이에요. 그 직감은 아마도 나 자신에게 보내는 내 나름의 경고였을 겁니다. 날 아프게 할 사람을 알아보는 것. 그건 진창에서 사는 생명에게 꼭 필요한 생존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다를까요. 다르다고 한들 얼마나 다를까요.             p.113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일아홉 번째 작품은 허진희 작가의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이다. 허진희 작가는 <독고솜에게 만하면>, <좋아한다는 거짓말> 등 청소년 소설로 만나왔기에, 이번 신작이 더욱 기대가 된다. 이 작품은 어릴 적부터 함께해, 서로가 부재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던, 그러나 결국 떠나보내야만 했던 ‘단짝 친구’와 나눴던 설익은 감정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 닥쳐온 가난, 기어코 찾아온 상실을 찬찬하게 풀어내고 있다. 도서 구매 시 초판 한정으로 타로 카드 4종과 특별한 카드 1종이 책 속에 한 장씩 들어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보는 타로 점을 모티브로 제작한 거라 더욱 의미가 잇는 굿즈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스파클'이라는 스폐셜 카드가 왔는데 골드 컬러가 너무 아름답다. 카드 뒷면에 담겨 있는 글귀 또한 책 속 내용과 연계가 되는 지혜라 인상깊게 읽었다. 


살아온 세계도, 살아갈 미래도, 성격도, 외모도, 가진 것들이 전부 달랐던 두 소녀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단짝 친구와 나눈 서투르고 미숙한 감정과 현실적인 이유로 기어코 찾아온 상실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변화해가는 두 소녀의 마음과 관계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져서 공감하며 읽었다.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본 상대라고 할지라도, 상대에 대해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나랑 너무 달라서 좋았던 부분들이 결국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될 수 없으니까. 나도 네가 되어볼 수 없고 너도 내가 되어볼 수 없으니까. 이 작품은 달콤한 샴페인과 화려한 일루미네이션 이후에 남겨지는 쌉싸름하고 고독한 시간들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려깊고 다정한 작품을 통해 한때 우리를 빛나게 했던 그 감정들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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