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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오딧세이 - 한 끼에 담아낸 지속 가능성의 여정
김태윤.장민영.황종욱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나의 식재료 안에는 요리법과 사용법뿐 아니라, 그 민족이 계승해 온 문화와 수많은 개인의 기억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하나의 식재료가 사라지면, 그 재료가 품고 있는 세계도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아워플래닛에서 시도하는 이러한 음식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오래된 세상을 향한 오마주기도 하다. 별이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은 시간을 타고 우주로 유영하듯, 내가 하는 음식 또한 꺼지지 않는 불빛을 향한 염원인 셈이다. p.167
계절과 상관없이, 어디서 나는지와 관계없이, 온갖 식재료가 손쉽게 식탁에 오르는 시대다. 유례없는 풍요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복잡한 유통망을 거치며 식재료 본연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된 소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쓰였다. ‘로컬 오딧세이’는 시간과 망각에 맞서 지역 식문화의 지혜를 발굴하고, 식재료와 생산자, 소비자 사이의 끊어진 연결을 회복하려는 시도로서 지속이 가능한 미식을 연구한다. 요리사, 음식탐험가, 음식 문헌 전문 번역가인 세 저자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은식 생태계의 다양성 파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지속이 가능한 미식을 연구하는 ‘아워플래닛(ourplanEAT)’을 만들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로컬 오딧세이’는 특정 지역을 선정해 그곳의 식재료와 식문화를 심도 있게 취재하고, 이를 여섯 개의 요리로 이뤄진 디너로 재해석해 선보이는 아워플래닛의 메인 행사다. 이들은 지리산을 시작으로 각 지역의 식재료와 식문화를 취재해 여섯 개의 요리로 이뤄진 디너로 재해석하는 행사를 3년 넘게 꾸준히 이어 왔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바다와 연안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각 지역의 생산자를 만나고, 그들이 생산한 식재료를 탐구하며, 그것을 요리로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음식을 더 깊이 알고, 책임감 있게 소비하며, 의미 있는 소통을 회복해 가는 여정이다.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고 소비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닌, 한 끼를 먹더라도 그 재료를 내어 준 우리의 행성 지구와 지역의 생산자,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식문화까지 지켜 나갈 때 지속 가능한 미식의 여정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있는 책이라 더욱 의미있는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식감이라는 식감은 전부 그 냄비에 들어 있는 듯했다... 음식이 주는 위안이 무엇인지, 제철의 산지 재료를 챙겨 먹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체득하는 밤이었다. 그 짧은 평화 속에서 하루가 저물어 갔다. 부처님 말씀처럼 인생은 본디 고통이어서 쓰디쓰지만, 그 쓴맛을 달래 줄 사탕 같은 존재가 일상의 틈마다 숨어있다는 사실을 그날 밤 우리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기쁨으로 어른들은 신산한 삶의 순간을 위로하는구나 싶었다. 확실히 내 앞에 이전과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p.83~85
기장의 말똥성게와 말미잘, 속초의 홍게와 부새우, 태안의 칠게와 아말피 레몬, 제주의 멸치와 풋귤, 울릉도의 홍감자와 명이, 거문도의 뿔소라와 삼치 등 각 지역의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로컬 푸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게는 해조류를 무차별적으로 먹어 바다 사막화를 일으키는 주범이기에, 죄책감 없이 마음껏 먹음으로써 바다를 지킬 수 있는 드문 식재료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동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한 주먹물수배기, 일명 '감자떡'이라는 생선은 손질부터 극강의 난이도를 요하는 재료였지만 요리했을 때 탱탱한 질감과 입안에서 부드럽게 퍼지는 고소한 풍미가 비범하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지구상에 존좨하는 산소의 많은 양이 갯벌에서 생성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산소는 식물 플랑크톤의 광합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데, 1g의 갯벌 흙에는 수억 마리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존재한다고 하니 말이다.
말미잘로 만든 대만식 전병, 스페인식 멸치 초절임, 다시마를 이용한 꽈배기, 홍게살과 초당옥수수로 만든 가스파초, 반건조 옥돔과 초피 잎으로 맛을 낸 쓰촨식 빙떡 등 생각지도 못했던 재료들이 셰프들의 손에서 파인다이닝 급 요리로 재탄생했다. 재료를 통해 요리를 구상하는 과정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요리를 구상할 때 머릿속에 재료를 펼쳐 놓고, 식감과 색감, 향, 맛 등을 기준으로 일종의 다이어그램을 그린다고 하는데,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과 셰프의 창의력이 잘 어우러져 탄생한 음식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낯선 식재료로 만들어지는 근사한 요리와 익숙한 식재료로 빚어내는 색다른 요리, 그리고 지역의 식재료에서 발견하는 지속 가능성 포인트까지 음식에 대해 배우고, 환경을 향한 실천과 노력까지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총천연색의 빛깔을 간직한 우리 자연과 그 산물들의 사진도 가득 수록되어 있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에서 오딧세우스가 마침내 고향 '이타카'에 닿았듯, 이 책을 통해 음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여정을 경험하고 각자 자신만의 이타카를 발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를 되새길 수 있게 해주는 이 아름다운 책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