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각본집
민규동.김동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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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로 만만치 않다. 허나, 투우의 완력에 밀리는 조각. 투우의 칼날이 점점 장비에게 가까워진다. 팽팽하게 맞서는 와중에 투우가 조각을 빤히 바라본다. 

투우: 머리도 셋고 주름도 지고. 벌써 이렇게 늙으면 어떡해?

투우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타탓- 조각이 투우를 제압하고 칼을 빼앗아 던진다.               p.82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과일이 만들어질 때부터 방부제로 보존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파과>의 주인공은 60대 '노년 여성 킬러'이다. 손톱이라는 의미의 '조각'이라는 가명으로 45년간 킬러로 살았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현직킬러이다. 여전히 젊은 그 누구에게도 실력으로 밀리지 않았지만, 차츰 자신의 신체적 노화가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참이다. 



원작 소설을 쓴 구병모 작가는 으깨진 과일.에서 소멸하는 육체에의 비유를 발견하고 이팔청춘이 지나가버린 늙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65세 할머니 킬러 조각은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친척 집에서 눈치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집을 나와 주방일을 하던 시기에 자신을 덥치려는 미군을 방어하다 죽인 것이 그녀의 첫 살인이었다.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정당방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 '류'에 의해서 전문 청부살인을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그녀 삶의 전부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살인이 아니었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살인을 했고, 무려 6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태껏 그 누구한테도 기대거나, 혹은 기대어보려고 마음을 먹거나 한 적 없이 자립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온 강단있는 여성 캐릭터이다.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작가는 '육체적인 소멸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킬러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했고, 그것은 영화 버전에서도 고스란히 보여진다. 늙어서 약해져 가는 인간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전반적으로 느껴지기 대문이다. 




강선생: ... 내가, 그날 살려서 그런 거죠? 살려서는 안 될 

            사람을... 살려버린 거죠?

아무 말 못하는 조각. 자신을 살려서가 아니라, 그를 쳐다봐서 이렇게 된 걸 어찌 이해시키나.

강선생: 그래도... 후회 안 합니다. 치료해드린 거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p.184


이 작품은 꽤 오래 전에 출간되었었지만, 초판을 읽었고, 이후 두어번 개정판으로 나올 때마다 다시 읽었고, <파쇄>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프리퀄 작품도 읽었기에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캐스팅으로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어쩐지 영상화된 버전이 원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을 것 같아 영화는 보지 않았다. 대신에 각본집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시작부터 '이 각본은 원작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인 또 다른 우주'라고 밝히고 있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원작이 아니라 영화만 보았다고 하더라도, 각본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영화에는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은 원래 계획은 '늙은 요원이 마지막 임무를 끝내고 조용히 현역에서 물러나는 이야기'였는데, 실제 전개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며 새로운 가족이 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고 말한다. 배우들이 만들어낸 생명력과 현장의 분위기 등이 예상치 못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또한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이기도 하니 말이다. 


겉표지, 속표지 모두 너무 아름다운 이 각본집에는 무삭제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함께 ‘투우의 그림일기’, 민규동 감독의 말, 원작 소설 《파과》의 구병모 작가가 쓴 추천의 글, 그리고 비하인드컷까지 수록되어 있다. 원작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들에게, 영화 버전을 만나 감동받은 이들에게 모두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 스틸컷을 담은 오리지널 필름 북마크도 받을 수 있고, 랜덤으로 출연 배우 및 민규동 감독의 친필사인이 들어가 있는 책을 받을 수 있으니 영화를 인상깊게 보았다면 각본집도 꼭 구매해야 할 것이다. 각본집을 통해 여러 사정에 의해 떨어져나간 무수한 장면의 조각을 떠올리고 퍼즐처럼 맞출 수 있을 테니 그것도 좋고, 원작 소설을 펼쳐놓고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재미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소설의 독백이 뜻밖의 장면에 대사로 변형되어 들어가기도 하고,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 장면의 편린이 다른 단락에 살아 있는 등 새로운 발견을 여러 차례하는 것만으로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 될테니 말이다. 한국 문학의 독보적인 여성 서사가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겨졌을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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