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지도의 뒷면에서
아이자키 유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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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둑어둑하던 길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길거리를 떠돌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런 후회가 잠깐 스치긴 했지만, 선을 넘어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지갑 안에 든 잔금을 계산할 때마다 비참한 마음이 들었고, 남은 인생에 비해 너무 큰 죄를 범한 건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 점점 더해졌다. 이것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p.41~42


고등학생인 코이치로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실직 후 술과 도박에 빠져 버렸고, 코이치로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긋지긋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틈틈히 일해 겨우 모은 돈 8만 엔이 사라져버렸다. 범인은 백수인 아버지였고, 결국 참았던 분노가 폭발해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만다. 눈이 쌓인 밤이었고, 그곳은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코이치로는 쓰러진 아버지가 폭설에 파묻혀 죽기를 바라며 그냥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다. 


무작정 떠나왔지만 신분을 증명할 수도 없고, 지낼 곳도 없었다. 계속 도망치려면 돈이 필요했지만,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아무리 배고픔을 참으며 추운 길을 걸어도, 가진 돈은 줄어들기만 했고, 모르는 지역을 걸어 다니면서 지도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가장 저렴한 소형 지도책도 가격이 천 엔이 넘어 선뜻 지갑을 열 수 없었다. 코이치로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취직하고,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소박한 인생을 꿈꿨을 뿐인데, 이렇게 앞길이 막막해지고 나니 그 꿈조차 얼마나 높은 완성도를 지닌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정밀하게 조직된 사회의 톱니바퀴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애초에 자신은 톱니바퀴는커녕 어디에 맞는 부품조차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진저리나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코이치로는 공원의 노숙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며, 비로소 머물 곳과 매일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싫은 인생이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참 하찮은 인생이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고 자란 땅밖에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고향에 뿌리내린 사람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 사이엔, 분명 후회의 깊이가 다를 것이다.            p.265~266


함께 지내던 노숙자 하마 씨를 통해 인력시장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된 코이치로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시작한다. 인력시장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정은 굳이 캐묻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처럼 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코이치로는 친구 같은 존재를 만난다. 대부분 나이가 많았지만, 그런 와중에 비슷한 또래의 노동자였던 A군과 가까워진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직을 하지 못해 방황하다 지금의 일용직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코이치로가 멋대로 동료 의식을 느꼈던 A군은 단순한 실업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A군은 자신이 이곳에서 음습하고 가혹한 밑바닥 인생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코이치로가 성실하게 사는 걸 보고는 일용직 생활도 제법 귀중한 체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후로도 코이치로는 각자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있는 노숙자, 프리터족, 일용직 동료 등을 만나며 그들을 통해 조금씩 삶을 배우고 성장해나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코이치로는 지도를 산다. 빈 캔을 주우러 다니면서 동네 지리를 알아보기 위해, 노점을 설치할 수 있는 장소를 기록해두기 위해 지도를 사용한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몇 년 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남긴 지도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인생을 엿보게 된다. 이 작품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너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아들의 이야기이자, 사회의 밑바닥을 직접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고생을 버텨낸 한 청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에 대해서, 세상에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코이치로가 힘들었던 순간에 그를 구원해준 것이 세상 속에서 별볼일 없어 보이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의미있다.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자는 그들의 소박한 마음이, 뭐든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코이치로에게 삶의 무게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이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느껴진다면, 이 책이 담담한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희망을 밝혀 내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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