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다시 창을 연다. 콧속 얼얼하게 만드는 찬 기운. 그래 이거였다. 나는 성탄절 전후의 공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냄새이기도 하고 기분이기도 했다. 잔뜩 웅크린 사람들에게 일말의 기대, 그래도 좋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기대를 갖게 만드는 그즈음의 공기는 반짝반짝한 것. 그리하여 느리게 와 서둘러 사라지는 겨울 한낮도 움직일 줄 모르는 시커먼 겨울치 한밤도 흥겨움과 정겨움으로 가득 채웠다. 만져질 듯 선하다. p.29
유희경 시인의 필사 에세이 <천천히 와> 그리고 오은 시인의 필사 에세이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함께 출간되어 '고요한 밤의 필사단'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올해 만났던 책 중에서 만듦새가 가장 예쁜 책이다. 사철제본에 표지를 아주 두툼하게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와 내지 곳곳에 수록된 일러스트도 감각적이고, 종이를 묶은 실컬러까지 색상을 맞춰 얼마나 마음을 담아 만들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은 시인이 직접 써 내려간 에세이 25편과, 시인의 문장을 따라 써볼 수 있는 필사 공간을 더했다. 읽고, 쓰고, 그 속에서 사유하고 머무르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아주 특별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다. 시인이 직접 고른 필사용 문장들과 시인의 어머니가 직접 쓴 손글씨가 더해져 더욱 분위기있는 책이 되었다. 필사용 글들만 모아놓은 필사집과는 달리 책을 읽다가 멈춰 문장을 따라 쓰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에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닌 정서적 필사의 경험을 만들어 준다.

4시부터는 도리 없이 월요일에 가까운 일요일이다. 적어도 오늘 기분은 그렇다. 이때의 낙담을 피하기 위해서 미리 독서를 계획해두었다. 어젯밤까지 절반쯤 읽은 책을 오늘 마저 읽을 계획이다. 근사한 계획이다. 나는 읽는 기쁨보다, 읽고 있다는 기쁨을 더욱 만끽하면서 드물게 충만한 기분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가득 채울 수 있는 요일은 일요일뿐이다. 일요일은 그 태생처럼, 보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일요일에는 신도 잠든다. 5시가 되면, 나는 월요일을 준비한다. 스스로에게 체념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p.227~228
유희경 시인은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시집 서점을 9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의 서점은 다른 가게 2층에 세들어 있기 때문에 문이 없다. 문이 없다 보니 도처가 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는 여는 문이고 안녕히 계세요 하는 것은 닫는 문이라고.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는 맞음과 배웅 또한 문이다. 문앞에 서서 정중하게 노크를 하면, 안에서 기척이 들린다. 밖이 안이 되고 안은 밖을 의식하는, 마음이 두근거리는 그런 게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책에는 서점을 운영하는 일상에 대한 글도 수록되어 있어 더 흥미롭게 읽었다. 이상한 것은 분면 산문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들이 시처럼 읽힌다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이, 사유와 은유가, 그리고 행간의 여백들이 모두 시같은 산문집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왜 이 책을 일반적인 산문집이 아니라 필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었는지 알 것도 같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뭔가 끄적여 보고 싶다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유희경 시인과 오은 시인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온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친구의 말’을 덧붙이며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에게 마음을 건네는 구조로 만들어져 더욱 특별하다.
일반적인 필사집을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던 경험이 있거나, 책을 읽을 때 여백에 메모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쓰면서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인생의 좋은 날을, 이제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기다려 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마음을 쓰는 일이고, 천천히, 느리게, 다가오는 것을 믿어야 하는 일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