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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는 고대 그리스 세계를 서양의 기원으로 간주하지만 헤로도토스, 호메로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고대 그리스 세계는 그와 달리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세계였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아테네 정치가들이 장려한 세계관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우리>와 <그들> 사이의 크나큰 차이에 의해 세계가 갈라졌다는 시각을 고수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의 후손이자 그들로부터 서양 문명의 계보를 이었다고 여겨진 자들은 정작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p.56~57
법률로 노예제를 보장하고 인종주의를 그 구조의 핵심적인 신념으로 삼는 식민지 사회에서 흑인 노예이자 젊은 여성인 열여덟 휘틀리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백인 식민지인 가운데 다수는 10대 흑인 소녀가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가 직접 쓴 것인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밝히라는 대중의 요구도 거셌다. 그래서 법정에 모여 자신이 쓴 시집의 저자임을 증명하도록 소환된 것이다. 인종, 나이, 성별 탓에 여론은 불리했지만, 결국 휘틀리는 승소했다. 그리고 1년 뒤에 마침내 그녀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휘틀리의 생애와 저작은 서양 문명이라는 발상에 담긴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써 생물학적 서양이라는 이념에 도전한 것이니 말이다.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역사가인 니냐 맥 스위니는 이 책을 통해 휘틀리 처럼 서양 문명의 경계선에 있던 열네 명의 삶과 저작을 통해 <서양 문명>으로 알려진 거대 서사를 낱낱이 풀어헤친다. 일반적으로 서양사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 로마부터 암흑의 중세와 찬란한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주의 시기 유럽과 근대화된 대서양 연안 국가를 지나 산업혁명,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계보로 읽어낸다. 하지만 이 책은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나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아랍의 최초 철학자, 포르투갈에 맞선 북아프리카의 왕 등을 통해 그동안 감춰졌던 서양이란 역사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소개된 인물들 중에 헤로도토스, 프랜시스 베이컨, 조지프 워런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처음 들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기에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서양이라는 개념과 서양 문명이라는 것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는 특정한 이념적 기능을 수행했기에 17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면서 구성되고 대중화되었다. 그것은 서양의 기원에 대한 신화를 제공했으며, 그 신화는 수준 높고 영광스러운 과거를 바탕으로 지배를 정당화하고 예속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였다. 그러나 이제 그 이념적 기능은 쓸모를 잃었다. 오늘날 서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인종적 억압이나 제국주의적 패권을 지탱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원 신화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그 결과 서양 문명에 대한 서사를 근대 서양의 자유 민주주의 원칙에 더 알맞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p.455
<서양>은 어떤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보통은 어떤 문화적 요소 및 정치적, 경제적 원칙을 공유하는 근대적 국민 국가를 일컫는데 사용된다. 우리에게 서양사는 언제나 단일하고도 선형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문명의 기준이 되어 <서양>이라는 이름은 진보와 합리성, 보편의 가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저자는 주류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서양이라는 개념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우리가 당연히 서양이라 여겨 온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결론에 이른다. 16세기 후반에서 시작된 서양과 비서양의 구도는 18세기에 정착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양이라는 이름은 점차 하나의 권위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이란 역사는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지금과 같이 정의된 걸까. 이 책은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익숙한 서양사의 외피를 걷어 내고, 그 안에 감춰진 민낯의 역사를 보여 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왜 서양의 역사와 문명을 인류의 중심이라 여기는가? 그 인식은 과연 사실인가? 이 책은 서양 문명이 지닌 역사적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서양의 기원을 검증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순수하고 온전한 선형적 족보라는 환상을 벗겨 낸다. 그리고 서양 문명이 이념적 도구로 작동한 방식을 생각하고, 그것이 출현해 오늘날 익숙한 거대 서사로 발전해 나간 과정을 추적한다. 수천 년 역사를 조망하는 책이기에 분량도 상당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결코 수월하게 읽힐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감춰져 온 진정한 서양 문명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었다. 자, 역사에 드리운 왜곡과 오해를 걷어내고, 진짜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