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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 ㅣ 정호승 우화소설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어느 집 뒤뜰 감나무에 박혀 있는 못이다. 큰 대못은 아니고 아이들 가운뎃손가락 길이 정도 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누구나 다 사는 제자리가 있고 쓰이는 용도가 있는데, 이렇게 엉뚱하게도 감나무 둥치에 깊이 박혀 사는 나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사실 나는 사는 게 퍽 고통스럽다. 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 '못자국' 중에서, p.22
종이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 바다는커녕 영산강이나 낙동강 같은 큰 강에도 한번 다다르지 못했다. 아이들이 만든 종이배는 개울에 띄웠다 하면 늘 얼마 가지도 못하고 기우뚱거리다가 그만 물살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종이배는 자신이 그래도 명색이 배인데, 한 시간, 아니 단 십 분이라도 제대로 유유히 흘러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신을 만드는 소년에게 바다로 가는 게 꿈이라고 말을 건넨다. 소년은 종이배인 주제에 꿈이 크다고 비웃었지만, 친구들이랑 내기를 하면서 일등 하면 바다로 보내주겠다고 말을 한다.

그날 종이배는 최선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일등을 했다. 어쩌면 소년이 바다 구경을 시켜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종이배에게 바다는커녕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냇가에 버려둔 채 친구들과 우르르 뛰어가버렸다. 그렇게 냇가에 버려진 종이배에게 시간은 어김없이 잘도 흘러갔고, 이대로 바다도 보지 못하고 죽나 싶어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종이배에게 말을 걸었고, 사연을 들은 소녀가 종이배를 바다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하지만 바다는 여기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위험한 곳이라 가라앉지 않도록 미리 연습을 하기로 한다. 결국 종이배는 소원대로 바다에 가서 뒤집히거나 가라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왜? 나도 갈 수 있어. 바다로 가는 게 내 꿈이야."
"종이배인 주제에 꿈은 크군. 하긴 꿈이야 뭔들 못꿀까."
소년은 나를 비웃었다. 나는 그런 소년이 미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를 만드는 이가 바로 소년이었으니까. - '종이배' 중에서, p.213
정호승 시인이 쓴 단 하나의 장편 우화소설 《연인》과 그동안 모아온 단편 우화소설을 엮은 《항아리》, 《조약돌》 이렇게 3권이 함께 출간되었는데, 두 권을 먼저 읽고, 이번에 마지막 이야기를 읽었다. 시원한 물속 풍경이 멋진 표지 이미지를 가진 <조약돌>은 시인이 쓴 단편 ‘우화소설’ 중 43편을 모아 엮은 단편집이다. 강가를 떠나 어디 다른 데 가서 살고 싶은 꿈을 가진 조약돌, 몹시 춥고 외로워 누구를 꼭 껴안아 보고 싶은 빈 들판, 명태잡이 어선의 그물망에 걸린 명태, 연자방아를 돌리는 어린 망아지, 모래를 쌓아 쉴 곳을 만들고 싶은 갈매기, 자신이 생화보다 아름답다고 믿는 조화 장미 등 작고 사소한 것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면서 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며 삶을 비관하는 돌멩이도 있고, 아무도 자신을 찾아와주지 않아 외로운 주춧돌도 있다.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보는 것이 소원인 개구리도 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보는 것이 고민인 플라타너스 나무의 그늘도 있다. 정호승 시인의 아름다운 상상력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들 모두 언젠가는 귀중하게 쓰일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감각으로 다듬어 새로운 장정으로 펴낸 세 작품 <우화>, <항아리>, <조약돌> 모두 동시대적 언어 감각으로 세공되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다가온다. 박선엽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표지와 본문 삽화를 전면 풀컬러로 새롭게 꾸며 시인의 글과 조화로운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시인이 세상에 건네는 다정한 위로의 이야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