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정호승 우화소설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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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마 끝에 매달려 사는 삶보다 이렇게 날아다니며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삶에 있어서 형식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삶의 형식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요?"

"그건 사랑하는 마음이야. 삶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모두를 바치는 것이 가장 중요해. 사랑이야말로 삶의 전부야."            p.66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남 화순 운주사 대웅전 서쪽 처마 끝에 달려 있는 풍경의 물고기이다. 얇은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는 물고기는 먼 데서 불어온 미풍에도 하늘을 날듯 지느러미를 하늘거린다. 한 스님이 인사동의 어느 가게에서 풍경을 두개 샀는데, 각각 생김새에 따라 푸른툭눈과 검은툭눈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대웅전 양쪽 처마 끝에 달린 채 매일 마주 보고 풍경 소리를 나누는 푸른툭눈과 검은툭눈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푸른툭눈은 사랑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뜨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검은툭눈은 사랑이란 무덤덤해지면서 그윽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정의도, 헤어짐에 대한 생각도,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던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는 검은툭눈과 달리 푸른툭눈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푸른툭눈이 쇠줄을 끊고 날아올라 온세상을 떠돌며 사랑에 대해,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깨닫게 되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처마 끝에 매달려 사는 삶에서 벗어나 날개를 단 비어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된 푸른툭눈은 산을 넘고 강을 지나 바다를 건너 서울까지 날아간다. 소나무에 앉아 있던 흰물떼새를 만나고, 젊은 시인을 만나고, 비둘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찹쌀붕어빵들과 횟집에 갇힌 물고기들과 서울역의 노숙자까지 만나며 푸른툭눈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충족된 삶을 살고 있을 때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감정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사랑하고, 한 번뿐인 생을 헛되이 살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사하며 잠들게 된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뭉클하게 가슴에 남는 이야기였다. 



"하필이면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너라고 해서 고통이 없으란 법은 없다. 나에게도 고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저의 상처가 깊습니다."

"상처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진주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이다."

"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넌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어라. 잃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아라."              p.143


등단 50년이 넘는 동안 끝없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온 한국 서정시의 거장, 정호승. 그가 시인일 뿐 아니라 소설과 동화로도 마음을 건네온 이야기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쓴 단 하나의 장편 우화소설 《연인》과 그동안 모아온 단편 우화소설을 엮은 《항아리》, 《조약돌》 이렇게 3권이 함께 출간되었다. 운주사 물고기 풍경이 사랑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모험을 담은 장편 《연인》, 버려진 항아리, 바다로 가고 싶은 종이배, 생화 사이에 놓인 조화 장미 등 작고 사소한 것들의 짧은 이야기들을 엮은 《항아리》, 《조약돌》을 오늘날 감각으로 다듬어 새로운 장정으로 펴냈다. 


이번에 나온 버전은 동시대적 언어 감각으로 세공되었으며, 박선엽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표지와 본문 삽화를 전면 풀컬러로 새롭게 꾸며 더욱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책의 만듦새가 너무 예뻐서 소장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연인>은 실제로 운주사에 갔다가 물고기 한 마리가 떨어진 풍경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청량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담백하면서도 맑은 이야기였다. 예쁜 표지만큼 본문에 수록된 컬러 삽화들도 예뻐서 시인의 글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사랑은 말하기 쉽고 노래하기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 그러니 사랑해야 할 이들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사랑하라는 시인의 메시지가 여운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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