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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판타지는 호메로스가 노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배우들이 연기하던 장르다. 현대 판타지는 중세 시대의 로맨스와 초현실주의, 현대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는 여전한 사실이지만 더 이상 크게 외칠 필요는 없어졌다. 고상한 척해대는 몇몇 잡지와 노년의 교수들이 누레진 노트를 들고 수업하는 강의실을 제외하고 우리의 투쟁은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판타지는 출판문화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 전반에 퍼졌다. p.19~20
판타지라는 장르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일상적인 풍경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 안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환상의 세계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낸, 사실 같은 거짓말을 구축해내는 비밀이 늘 궁금했다. 판타지는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구조를 더 날카롭게 비추어 낸다.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은 판타지 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아홉 가지 관점으로 밝혀 나간다. 이 책의 저자인 판타지 문학 연구자 브라이언 애터버리는 판타지를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판타지가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 걸까. 저자는 그에 대해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판타지는 사람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의지한 전통적 신념과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한다. 신화는 우주를 설명할 뿐 아니라 집단, 계층, 젠더의 역할, 의례와 종교적 의무까지 보여주는데, 판타지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화와 우리의 관계를 재창조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또한 판타지는 메타포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도 있다. 메타포는 우리가 아는 대상과 미지의 대상의 간극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데, 판타지에서는 마법을 발휘하는 장치들을 문자화된 메타포로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판타지는 구조적으로 진실이 될 수 있다. 판타지의 구조는 세상의 형태를, 특히 변화의 형태를 반영한다. 판타지는 성을 건설하고 왕국이 멸망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 아니라 성장과 욕망 같은 개인 내면의 변화가 구조화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렇게 신화와 메타포, 구조를 통해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알아보았다. 겨우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판타지와 사실주의, 신화를 전승하는 판타지, 문학의 사회적 기능, 유토피아 문학 등에 대해 9장에 걸쳐 이야기하는데, 판타지 문학을 즐겨 읽고 좋아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판타지는 환상 동화의 해피 엔딩을 지키는 한편 결말을 복잡하게 만들고 스토리 곳곳에 해결의 실마리를 배치해야 한다. 이로써 단순히 공주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거나 괴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식이 아니라 한 세계가 신뢰, 사랑, 투지, 친절함, 연대감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독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공포와 트라우마를 파악하고, 이를 초월하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무기로 무장된 전쟁터를 사람이 사는 동네로 바꿔놓는 시나리오야말로 이 힘든 시기에 가장 필요한 마법의 주문이다. p.157
어슐러 르 귄은 '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라고 말했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시리즈 등 판타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르이자 가장 대중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이 판타지 장르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이 흥미진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슐러 K. 르 귄, J. R. R. 톨킨, 조지 R. R. 마틴같이 대표적인 판타지 작가들의 작품부터 은네디 오코라포르, 헐린 웨커, 알리에트 드 보다르드 같은 현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방대한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왜 판타지를 읽을까? 또는 책을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 왜 우리가 사랑하는 그 책들에 빠지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판타지 문학이 우리가 더는 견딜 수 없는 장소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현실의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바라보고, 두려움 너머를 엿볼 수 있다. 판타지가 일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이야기보다 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판타지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며, 때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도구가 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읽고, 보고, 사랑해온 판타지 세계가 실제 사회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여정을 통해 판타지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판타지라는 문학 장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