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지와 광기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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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둘러보니 고기를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시대가 달라진 거죠. 담배도 안 피우고, 카페인 음료는 점점 많이 마시고요.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아직도 섹스는 하나 모르겠군요. 모든 게 재미없고 시들해졌어요. 개인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에 대한 담론이 줄기차게 이어졌죠. 런던으로 주말여행을 떠나거나 아우토반에서 야간 근거리 드라이브를 하는 소소한 즐거움조차 누리는 사람이 없어졌단 말입니다.            p.11~12


채식주의가 사회의 주류가 되어 육식이 감춰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 된 세상. 동네에서 정육점들은 자취를 감췄고, 레스토랑들은 일제히 메뉴를 채식으로 바꿨으며, 마트에서는 정육 코너를 다른 코너들과 분리시키고 죽은 동물의 모습이 유해하다는 이유로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고기를 즐겨 먹었던 주인공 ‘나’는 주변의 압박과 강제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기를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할복할 것이냐의 문제라면, 고기를 먹는 것이 매순간 주변사람들의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채식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나날이 계속된다. 


믿을 수 없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냉장고에 있는 소시지 한 토막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급기야 환각을 바라보기도 한다. 거리를 걸으며 포크와 나이프 없이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흡입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사람들의 얼굴, 나무 위에 앉은 새들... 사방에 모든 것이 고기로 보이기 시작한다. 고기 종류가 아닌 어떤 음식을 먹어도 반시간만 지나면 다시 허기가 졌으며, 계속 배가 고팠다. 그렇게 밀려오는 폭력의 환상과 싸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티가 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하지만 식사시간은 우울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작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러던 중 유명한 채식주의 블로거와 은밀하게 활동하는 육식지하조직의 수장이 그에게 접근해오면서 채식과 육식이라는 양 극단의 광기를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게 실상은 더 복잡하죠. 베르트가 말했습니다. 갑자기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축산업계의 근면한 노동자들이 나를 위해 고기를 생산해내는 일을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 있는 노릇은 아니에요. 내가 그러기로 결심해도, 이미 많은 동물이 나를 위해 마구간에서 도축될 날을 기다린다고요.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한 명 더 생겼다고 캡티브볼트라든가 그런 걸 그냥 꺼버릴 수 있나요. 그러니까 불쌍한 동물들을 도살한 다음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거죠. 모든 게 그저, 내가 갑자기 그것들을 먹기에는 너무 선량해졌다는 이유만으로요.                 p.77~78


'나'는 유명한 채식주의 블로거 '톰 두부'의 블로그에 방문해 채식주의 초기의 어려움과 대응법, 어떤 문제를 어떤 식으로 가장 잘 피할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행복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글을 읽는다. 그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채식주의는 사흘도 넘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메일로 연락을 했고, 그는 이겨내야 한다고 격려하는 답장을 준다. 덕분에 '나'의 절망은 차츰 흐릿해지고 예상 밖의 환희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톰 두부를 직접 만나 현재의 기분과 간질병과 흡사한 자신의 발작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톰 두부는 마치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님처럼 '나'의 이야기에 연민을 표해가며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글을 써보라는 그의 조언대로 그의 블로그에 올릴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육수맛내기69’라는 수상쩍은 닉네임을 가진 자는 '나'에게 불교계와 제약산업, 무기산업, 포르노산업, 콩과 두부 산업체가 거대한 ‘채식 카르텔’을 이루어 왜곡된 채식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육식지하조직에 들어와 함께 육식주의를 되돌리자고 제안한다. 기대감에 들떠 그들의 활동에 적극 가담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어딘가 우스꽝스러웠던 서사가 결국 살인과 유혈극으로 이어지게 되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그가 살인 용의자로 심문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었다. 극중 무자비한 공장형 축산의 폐해와 환경 오염에 대한 일장연설은 채식주의에 담겨 있는 불편한 부분을 도발적으로 극대화시킨다. 작가는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날카로운 풍자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어떤 가치를 지향하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유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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