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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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극중극에서 "엄마 딸로 태어나서 다행이에요"라고 에이미 역의 파비안느가 말하는 것은 '상냥한 거짓말'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상냥한 거짓말을' 하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홀로 대본을 읽으며 머리를 끌어올려본다든지. 그러면서 내일 그 장면을 다시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픽션과 현실이 파비안느 안에서 교차해 '진실'에 다다른다.... 이러면 제목에 들어 있는 '진실'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층적으로 작용한다고 할지, 시니컬한 느낌을 함유하게 된다.... 단편적이었던 점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오늘이 '그날' 이었나.......                  p.116~117


<환상의 빛>,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육성을 고스란히 들어볼 수 있는 책이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카트린 드뇌브, 쥘리엣 비노슈, 이선 호크 주연의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이르는 8년간의 기록을 중심으로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직접 찍은 현장 스케치 사진부터 손그림으로 그린 스토리보드와 인물구상도, 그날그날의 촬영 기록, 이선 호크에게 보내는 편지, 틈틈이 영화를 보고 배우를 연구하고, 책을 읽으며 쓴 일상 단상, 스태프들에게 보낸 새해 연하장, 고민을 담은 일기 등 그의 영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회고록 발간을 앞둔 전설적인 여배우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엄마의 집에 온 딸의 이야기를 그린다. 엄마의 회고록을 읽은 딸은 책 속 내용이 거짓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에게 말한다. 이 책에 진실이라고는 없다고.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 역은 까뜨린느 드뇌브, 그녀의 딸 뤼미르는 줄리엣 비노쉬, 사위 역은 에단 호크가 맡았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들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모녀의 서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장 잘 만드는 장르인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모녀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국내에서는 2019년에 소개되었었는데, 이 영화를 인상깊게 봤었다면 그 비하인드를 만날 수 있는 이 책 또한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상영이 끝나고 상영 기사가 내려와 "어땠어? 좋았지?" 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래, 영화제에는 매번 이 의식이 있었다. 영화 만들기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시간, 무거운 기재, 상영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수고, 필름 교체를 표시하기 위해 필름에 각인되던 마크. 그것들이 영화 및 영화 만들기의 시간과 공간을 일종의 '축제'로 바꿔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영화관의 어둠까지 사라져가고 있다. 내게는 종이가 아니면 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관을 잃으면 영화는 영화가 아니게 될 것 같다.                 p.296


2011년부터 2019년까지의 촬영일지와 일상 단상을 적은 글에, 2023년에 쓴 프롤로그와 작가 후기를 붙여, 가장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생각을 담은 책이 되었다. 한국에서 촬영한 <브로커>에 대한 이야기와 최근작 <괴물>에 대한 기대 등도 솔직하게 담겨 있다. 배우, 영화 들의 숱한 고유명사가 등장하는데, 350여 개의 짧은 각주를 수록해 이해를 도와준다. 


영화 안팎에 대한 거장의 생각을 비롯해, 영감의 원천이 된 도서와 영화 목록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배우에게 보내는 감독의 편지, 그리고 배우와 감독의 대화 또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내용이라 흥미진진했다. '영화감독이란, 영화 찍기란 힘들지만 재미있는 일이구나.'하고 생각해준다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영화감독이 디렉팅외에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차츰 깨닫게 된다. 




사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원래 도쿄 시부야의 파르코 극장에서 연극 무대에 올릴 생각으로 준비한 이야깃감이었다고 한다. 첫 제목은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인생 말년을 맞이한 노년의 여배우 이야기로, 마지막 상연 날 무대 전후의 분장실이 배경이었다. 그로부터 십오 년이 흘러 시나리오는 제목도 배경도 테마도 캐스트도 모두 바뀌어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인 것이다. 연극으로 구상되었던 작품이 어떻게 영화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모든 과정 또한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평범하고 심심한 듯한 서사인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고, 그들간의 갈등과 상처를 사려 깊고,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지독하게 인간적인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세밀한 디테일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꼼꼼히 현장 스케치 사진을 찍고,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리고, 세트가 될 집에 머물며 장소에 맞게 대사의 길이를 조정하고, 배우의 해석을 경청하여 장면을 수정하고, 틈틈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영화를 배우고 인간을 연구하는 등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든 과정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우주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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