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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셰바이천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피해자의 신원을 찾고 그들이 피살된 경위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셰바이천의 살인 동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홍콩이라는 압력솥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안고 있다. 그러다가 압력을 못 이기고 폭발해 머리에서 나사가 빠져버리면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는데, 이 모든 건 주사위를 던지듯 운에 맡길 뿐이다. 사회복지사도 인류학자도 아닌 경찰은 그런 사회문제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p.52
홍콩의 구닥다리 아파트인 단칭맨션에서 한 남자가 자살한 채로 발견된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41세 셰바이천은 무직으로 방 안에서 숯을 피워 죽었다. 경찰은 타살 혐의가 전혀 없고, 범죄 연루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무심코 열어본 옷장 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옷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유리병 속 보존액에 담긴 인간의 팔다리와 장기, 얼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로 20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방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표본이 된 시신은 대체 누구란 말일까. 낯선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언론은 '은둔족 살인 사건' 또는 '은둔족 살인마' 같은 말을 만들어 내며 자살한 용의자가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망상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추측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유리병 20여 개에 담긴 토막 시신을 이어 붙인 결과 피해자는 남녀 각 한 명씩으로 추정되었다. 두 피해자의 연령대는 비슷했으나, 사망 추정일은 달랐는데, 여자는 수개월에서 최대 반년전, 남자는 최소 1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였다.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황이었다. 셰바이천의 방에 추리소설, 특히 엽기적인 살인을 다룬 소설이 많았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증거가 될만한 요소가 없었다. 경찰 쉬유이와 셰바이천의 친구이자 이웃에 사는 추리소설가 칸즈위안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최선을 다했다는 건 나도 알아요... 시스템에 속한 모든 사람은 언제나 현실적인 선택을 하죠. 두 가지 선택지가 앞에 있을 때 자기 윤리 기준을 위배하지만 않는다면 리스크가 적은 쪽을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에요. 다만 이 평범한 선택이 쌓이면 '악'이 될 뿐입니다...... 바이천 한 명이 희생하면 수천수만 명의 안온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데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정의를 명분으로 앞세운 그런 선택은 결코 정의가 아니에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악입니다." p.390~391
이 작품은 <13·67>, <망내인>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탄탄한 독자층을 보여하고 있는 찬호께이가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되어 왔는데, 이번에는 <13·67>처럼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하며 읽어 보았다. 이야기는 은둔족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현재와 화자를 알 수 없는 '망자의 고백', 그리고 제목 미정인 소설에서 발췌된 내용이 교차로 진행된다. 셰바이천의 친구인 칸즈위안은 경찰에게 용의자였다가 조력자가 되는데, 경찰은 그를 경계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사건을 조사해나간다. 수사 과정과 별개로 진행되는 두 가지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단서가 되어 주기도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덕분에 중반을 넘어서도 쉽게 진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이 작품의 중요한 재미가 되어 준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홍콩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단절과 무관심이 일상화된 풍경을 보여주며 인간 심연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지만, 가끔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독이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진다. 용의자의 주변을 조사할수록 수사는 점점 더 미궁에 빠지고, 사건의 조각들이 쌓일 수록 진실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을 향하게 된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 홀라 왔다가 떠날 때도 혼자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 인간에게 고독은 정해진 운명 같은 것, 인생이란 원래 고독한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고독이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람과 사회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안전한 방 안으로 숨어든 '은둔형 외톨이'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면, 이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5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이지만 중반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탄탄한 구성과 플롯으로 잘 짜여진 작품이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에 나왔던 캐릭터가 등장해 반가웠고, 거듭되는 반전 또한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주었다. 자, 오랜 만에 만나는 찬호께이의 본격 미스터리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