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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수명 - 진실한 글을 향한 예술과 원칙의 대결
존 다가타.짐 핑걸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열여섯 살 레비 프레슬리가 스트래토스피어 호텔앤드카지노의 350미터 높이 타워 전망대에서 뛰어내린 그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시 당국이 영업 허가를 받은 관내 스트립 클럽 서른네 곳에 대해 한시적으로 랩댄스를 금지시켰고, 고고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타바스코소스 병을 버키츠 오브 블러드라는 술집 지하에서 발굴했으며, 미시시피에서 온 한 여성은 진저라는 소녀를 상대로 35분 동안 틱택토 게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p.13~15
2002년 7월 13일,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 호텔에서 열여섯 소년이 투신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에세이스트 존 다가타는 그 사건에 대한 글을 쓰지만 사실 오류가 많다는 이유로 잡지에 게재를 거부당하고, 얼마간의 개고를 거쳐 다른 잡지에 재투고하게 된다. 글이 게재되는 조건은 내부 팩트체크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는 거였는데, 그렇게 인턴 편집자 짐 핑걸과 존 다가타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된다.
이 책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구성이 상당히 독특해 흥미진진했다. 존 다가타가 쓴 에세이 원문을 토막토막 쪼개어 페이지 중간에 수록하고, 양 옆으로 편집자의 팩트체크 과정과 두 사람의 논쟁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팩트가 충돌하는 내용은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책의 반 정도 되는 내용이 붉은 색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실제 편집 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진실은 정확성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에세이스트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철저하게 확인하는 집요한 팩트체커의 양보없는 끝장 논쟁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지금 제가 이 에세이에서 그러고 있다는 겁니까? '자기과시를 위해' 이야기를 '위조한다'고요? ... 한데 대관절 언제부터 약간의 지적 아나키즘이 나쁜 것이 되었죠?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예술의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결정짓는 규칙을 용납하기 시작했나요? 오히려 일상적 담론에선 잘 용납되지 않는 자유도 예술가에게는 권장되는 분위기 아니었습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예술에 의지하는 것 아닌가요? 예술가가 한계를 시험하고, 규칙에 도전하고, 금기를 파괴해주길 다들 내심 기대하지 않나요? p.135
엄밀히 말하면 이 설명은 부정확하다, 저자가 이 수치를 어디서 얻었는지가 불분명하다, 정보의 출처부터 좀 의심스럽다 등으로 조목조목 문장을 따지고 드는 편집자와 정확성에 치중하다 보면 극적 효과도 떨어지고 글이 너무 투박해진다는 에세이스트의 공방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신문의 기사면처럼 빼곡하게 구성이 되어 있어 가독성 자체는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따라가면서 읽다 보면 금방 빠져들게 되는 몰입감이 있는 책이었다. 글의 어감이 주는 느낌이 좋아 수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그러면 의도적으로 수치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독자의 신망을 잃지 않겠느냐고 받아치는 편집자. 그리고 자신이 무슨 공직에 출마할 것도 아니고 그저 흥미롭게 읽을 만한 글을 쓰고자 할 뿐이니 상관없다는 작가. 일다 보면 편집자의 말에도 수긍이 되고, 작가의 의도에도 공감이 된다. 그야말로 이성과 감성의 대결이랄까. '그의 죽음을 더 각별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의도와 독자들에게 명확한 사실을 제공해야한다는 사명감의 대결이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한 사람은 자료나 문헌을 확인하며 명확한 사실을 원한다. 또 한 사람은 어느 정도 변형된 사실이 사건의 실체와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독자에게 진실한 글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논픽션은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옳고, 사실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맞다.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가의 고민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어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 만들어져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다. 해리 포터를 연기했던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팩트체커 역을 맡기도 했다고 하니 연극 버전도 궁금해진다. 논픽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고찰, 편집과 집필 과정에 숨겨진 비밀, 틀림없는 사실과 그럴듯한 허구 사이의 진실... 진짜 업계 사람들의 속 뒤집히는 티키타카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