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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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리즈는 엄청난 실패를 겪어본 사람들에게만 마음이 간다고 말하곤 했다. 엄청난 실패를 한 번 겪어보아야만, 모든 희망이 완전히 짓밟혀보아야만 흥미진진한 삶을 꽃피울 수 있다고 믿었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자라지만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는 이기적으로 최대한의 햇빛을 받으며 수직으로,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것처럼. 에이미와 헤어지고 난 뒤에야 리즈는 어쩌면 에이미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실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255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항상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엄마가 된다면 외로움과 결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배어나던 여성성을 마침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삼 년 전 리즈는 에이미라는 이름의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지냈다. 에이미는 IT 업계에 괜찮은 직장이 있었고, 리즈는 그녀와 함께 트랜스 여성으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가정을 꾸리는 데 상당히 근접했다. 하지만 이제 리즈는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 들었고, 다시 미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리즈와 연인이었던 에이미는 육 년 동안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으면서 테스토스테론 억제제를 먹었다. 당시에 의사는 영구 불임이 될 거라고 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트랜스로 사는 게 지긋지긋해진다. 자신의 젠더를 실현하기 위해 이런 거지 같은 꼴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트랜스가 맞미나 꼭 트랜스로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트랜스 혐오로 가득한 사회에 지쳐 성환원(디트랜지션)을 결정했고, 현재는 에임스라는 이름의 생물학적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 에임스는 직장 상사인 카트리나와 연애 중이었고, 그녀가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문제는 이혼한 이성애자인 카트리나는 에임스가 과거에 트랜스젠더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그로서는 젠더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었고, 이제 다시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대체 어느 시점에서, 엄마는 아무 아기를 원하다가, 그 아기를 원하게 되는 걸까? 그런 변화가 언제 일어나는 걸까? 리즈는 카트리나가 유산을 하고 나서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아마도 그 첫 번째 유산에서 카트리나는 그녀의 아기가 아닌, 아무 아기를 잃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또 그 일을 치르려 할 수 있을까? 리즈는 늘 아무 아기의 아무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야 미처 몰랐던 진실을 깨닫는다. 리즈는 바로 그 아이의 바로 그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정체성과 거의 상관없는 애착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아기일 것이다.                 p.508


트랜스 여성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고달프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성전환이라는 것조차 가족들에게 절연당할 결심을 해야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어려운 것을 다시 되돌리는 성전환 환원(디트랜지션)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연인의 임신 소식에 고심하던 에임스는 항상 아이를 키우고 싶어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리즈를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은 사랑하는 카트리나와 함께 있을 수 있고, 카트리나는 임신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리즈는 원하던 아기를 키울 수 있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면 어떨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카트리나는 연인으로부터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얻을 수 있고, 리즈는 아기를 갖게 되고, 에임스는 여성이지만 여성이 아니고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모습으로 두 사람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이다. 과연 생물학적 엄마와 일종의 아빠, 그리고 아빠의 트랜스인 전 여자친구 세 사람이 함께 살며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토리 피터스는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이다. 주류문학계에서 벗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작품을 무료 배포하며 활동을 시작해 자신의 경험을 살린 글쓰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트랜스젠더 문학의 판을 넓히기 위해 트랜스젠더 온라인 커뮤니티에 작품을 무료로 배포하고 소규모 자비출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작품 <디트랜지션, 베이비> 부터이다. 이 작품은 트랜스젠더 작가 최초로 여성문학상 후보에 올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일반적인 퀴어 서사의 금기를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두 명의 트랜스젠더와 한 명의 시스젠더 여성을 통해 오늘날 사랑과 관계의 의미를 묻는다. 기존의 젠더 규범과 가족 구조를 해체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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