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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팔크의 말대로 에드릭이 작정하고 숨었다면 쉽게 찾아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미니언을 발견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술을 건 자와 마술에 걸린 자 사이에는 한 조각의 빵을 반으로 나눈 듯 일종의 연결고리가 생기기 때문이죠. 미니언을 산 채로 붙잡을 수 있다면, 술자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미니언과 암살기사는 마술의 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이 실을 눈에 보이게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만, 시간을 들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p.168
브리튼섬 동쪽, 런던에서 출항해 북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사흘 밤낮을 가면 두 개의 섬, 솔론제도가 있다. 이 황폐한 섬에서 도시의 기반을 닦아 발전시킨 것은 북해 무역을 장악한 에일윈 가문이다. 어느 날 솔론섬에 동방에서 온 방랑기사 팔크 피츠존과 그의 어린 종사 니콜라가 찾아와 자신들이 쫓고 있는 ‘암살기사’가 솔론의 영주를 노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날 밤 솔론의 영주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솔론섬은 북쪽과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동쪽은 암초가 많아 바이킹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역이었다. 밤이면 외부와 단절되는 섬에 숨어든 자는 누구일까. 솔론 영주의 호기심 많은 딸 아미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 위해 팔크와 함께 사건 조사를 시작한다.
팔크는 마술을 통해 살인 현장에서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을 찾아낸다. 은빛 가루를 뿌리고 숨을 불어넣자, 돌바닥에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실을 토대로 살인자가 어떻게 영주관에 침입했는지, 살인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찾아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악한 마술을 사용하는 암살기사는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을까. 팔크는 암살기사가 사용한 마술의 종류가 '강제된 신조'라 불리는 사악한 마술이라고 단언한다. 암살기사가 점찍은 인간의 피를 입수해 그 피를 은으로 만든 단검에 발라 납그릇에 채운 포도주에 담근다. 그러면 피의 주인은 가엾게도 암살기사의 앞잡이, 미니언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미니언이 암살기사에 의해 조종당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는, 그 일을 잊어 버리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살인을 행하고도 그 사실을 잊어 버린 '미니언'이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했다. 현시점에서 의심스러운 인물은 모두 여덟 사람이었고, 그들 중 누군가가 영주를 죽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영주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머무르고 있었을 ‘작은 솔론’이라는 거대한 밀실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영주를 살해할 수 있었던 자는 과연 누구일까?

"요컨대 그곳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밤중에 젖은 발로 작은 솔론에 침입한 자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은 즉 큰 솔론에 있던 다섯 명 중 누군가가 롤렌트 님을 살해한 미니언이라는 뜻입니다."
"그럴 리 없소!"
한 기사가 버럭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론은 철벽수비를 자랑하오. 동이 트기 전에는 큰 솔론에서 작은 솔론으로 건너갈 수 없지.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는 한, 당신 이야기는 전혀 믿을 수 없소." p.502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판타지에 미스터리를 접목시킨 특수 설정 미스터리인데, 지금이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았지만 출간 당시(2010년)만 하더라도 흔치 않았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논리에 입각한 수수께끼 풀이, 즉 본격 미스터리의 골격이 자리잡고 있다. '타인을 조종해 살인을 지시하는 암살기사와 그를 쫓는 마법기사'라는 설정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으로 풀어 나가는 본격 미스터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인데, 요노자와 호노부는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질 수 없는 두 가지를 한 작품 속에서 구현해낸다.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용의자, 하지만 마법이 실재하는 세계라면 초현실적인 능력으로 어떻게 '논리와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얼핏 상상이 잘 되지 않겠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특수한 설정을 사용한 미스터리라도 독자와 작가 사이에 합의된 명확한 약속이 있다면, 그 약속이 설령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닐지라도 미스터리는 성립한다. 거기에 미스터리라는 지적 유희의 심오함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그런 부분에서 만들어 진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추리의 전제로 받아들여 소설적 재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특수설정 미스터리'만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12세기 말 유럽으로 정한 이유로 수도사 캐드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지만, 같은 시대라서 주는 재미가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최신작들을 좋아한다면,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