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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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명. 애정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말이 지금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견은 한 종사관을 끌어내릴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한때는 너무 어려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박혔고, 시간이 흐르며 무슨 뜻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감춰진 진실. 피해자가 고통에 시달리는 동안 가해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 부조리. 찢어내야 할 거짓과 오해의 장막. 누명. 날카로운 가시처럼 목구멍에 파고드는 이 두 글자는 아무리 침을 삼켜도 내려가지 않았다.               p.151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벽 근처에서 젊은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장신구로 달고 다니던 자신의 은장도에 찔려 죽었다. 신분패를 확인하니 오 판서 대감의 딸로 이제 열아홉밖에 되지 않은 여인이었다. 유교의 법도에 따라 여성 범죄자를 체포하거나 여성 피해자를 검시하는 역할은 남자가 할 수 없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한성부 포도청 소속 다모였다. 노비 신분인 열여섯 '설'은 포도청 다모로 종사관을 도와 사건 수사를 돕는다. 수사 과정 중에 피해자의 몸종이 도망쳐 인왕산으로 횃불을 든 관원들과 함께 설은 수색에 나서게 된다. 인왕산이라면 백호가 산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설에게 공포의 장소였다. 그리고 실제로 호랑이와 마주하게 된다. 


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개울 반대쪽에 한쪽 소매가 피로 물든 한 종사관이 서 있었고, 바로 몇 발짝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다. 덩치가 사람만한 그 놈은 발이 솥뚜껑 같고 발톱은 날카로웠으며 가슴으로부터 깊은 으르렁 소리가 울렸다. 말은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몸부림치고 있었고, 그 뒤에 도망친 몸종이 웅크리고 있었다. 당장 호랑이를 겨눠야 했다. 설은 머뭇거리든 포졸 견을 대신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표적을 겨냥해 활을 쏜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호랑이의 몸통으로 날아가 퍽 꽂혔고, 놈이 내지른 포효에 놀란 말이 앞다리를 들고 일어나며 설을 허공에 던져버린다. 설은 그대로 정신을 잃게 되지만,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로 사건이 해결되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살인사건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쌓여가는 증거가 가리키는 범인은 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과연 진실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모음은 구분하기 쉬웠다. 가로선은 평평한 땅, 점은 하늘의 태양, 세로선은 똑바로 선 인간을 상징했다. 땅, 태양, 인간. 이 세 가지를 더한 것이 인생이라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거짓과 기만의 실로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 실을 따라가 한 종사관의 근본에 이르면 나는 어떤 진실을 보게 될까? 그가 마음 한가운데 품고 있는 진실도 가장 흔한 살인 동기인 욕정, 탐욕, 복수심, 이 세 가지처럼 단순할까?              p.295


설은 호기심이 넘치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가졌다. 설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하지만 1800년 조선이라는 시대는 어린 여자 노비인 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무시와 면박을 당할 때마다 '나를 구해줄 사람은 나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고난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설’뿐만 아니라 세상에 노비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며 하인에게 글 읽는 법을 알려준 ‘오 소저’,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우림’, 두렵다는 이유로 선행을 포기하지 말라며 남장을 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는 ‘강씨 부인’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서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왕이 승하한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배경으로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려는 소녀 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사라진 소녀들의 숲>으로 만났던 허주은 작가의 신작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에서 자란 작가가 15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쓴 역사 미스터리라는 점으로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전작들처럼 이번 작품 역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작품이다. 이민진 <파친코>,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등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에서 먼저 호평을 받고 나서 국내로 소개되면서 허주은 작가의 작품들도 국내에 꽤 많이 소개가 되었다. 벌써 네 번째 작품이니 말이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조선 세종 대까지 존재했던 공녀 제도를 중심으로 가부장 시대 조선 여성들의 삶을 그렸고,  <붉은 궁>은 조선시대 영조 치하의 궁궐을 배경으로 의녀를 주인공으로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함께 보여주었다. <늑대 사이의 학>에서는 조선 시대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을 배경으로 불의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았고, 이번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에선 1800년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조선을 배경으로 여성 수사관 다모가 사건의 비밀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뛰어난 가독성으로 책을 읽는 내내 우리를 조선 후기의 시간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열여섯 소녀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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