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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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혼자였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유럽 북쪽의 숲들을 갈아엎고, 그곳에 금속이 박힌 살덩어리들과 몇 년 뒤에 무고한 산책객들 코앞에서 폭발하게 될 포탄들을 살포했고, 자신이 만들어 낸 그 볼품없는 지진계에 고작 12등급만을 주었던 메르칼리조차 창백하게 질릴 만한 황폐함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p.42


석공이었던 남편이 공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다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는 아이가 조각가가 되어 미켈란젤로처럼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라고 짓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으로 인해 죽게 되면서 미모는 열두 살 나이에 한 석수장이에게 맡겨진다. 동생을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공방을 팔아 돈이 마련되면 미모에게 오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은 20년이나 걸린다. 낯선 나라에서 지내게 된 미모는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조각가 알베르토 밑에서 도제로 일하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왜소증으로 태어나 난쟁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지만, 아버지에게 조각하는 법을 배워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모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에 일을 하러 갔다가 평생의 운명이 될 소녀 비올라를 만나게 된다.


오르시니는 너무도 부유한 후작 가문이었고, 미모와 비올라는 같은 사회적 계층에 속하지 않아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비올라가 용기있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한 권씩 빼내어 미모에게 빌려 주었으며, 함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모의 꿈은 위대한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주정뱅이 밑에서 일하고, 짚 더미에서 잠을 자며, 돈이라고는 있어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비올라는 미모가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믿었으며, 그 대단한 재능으로 아름다운 뭔가를 만드면 좋겠다고 말한다. 비올라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여자에게는 책 한 권 볼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맹세한다. 그들은 거의 열네 살이었고,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자, 과연 두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까? 




「떠나자, 비올라. 난 이런 폭력에 신물이 나.」 

「떠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최악의 폭력, 그건 관습이지. 나 같은 여자, 똑똑한 여자, 난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습. 그런 말을 하도 듣다 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그 유일한 비밀이라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더라. 내 오빠들, 그리고 감발레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보호하려고 애쓰는 건 바로 그거야.」              p.595


1951년 어느 날, 이탈리아의 사크라 수도원에 비탈리아니의 피에타가 이송된다. 당시만 해도 사크라 수도원은 외딴곳에 있고 방문객 수가 무시해도 될 정도였기에 선택된 장소였다. 피에타상은 삼중으로 궤에 넣어졌는데, 제일 바깥 궤는 금속이고 안쪽 두 개는 목재였다. 그렇게 수도원은 비탈리아니의 작품을 안치한 뒤 지하 저장고의 문을 닫았고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이후로는 그 작품이 거기 있다는 소문이 돎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해지는 일련의 보안 조치들이 생겨날 뿐이었다. 피에타 석상은 첨단 경보 시스템으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하에 감금되어 접근이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곳을 드나들 열쇠를 갖고 있는 건 수도원장뿐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겁니다. 그녀는 거기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놀라울 정도로 잘 지내고 있죠. 그녀를 볼 권리가 아무에게도 없다는 점만 제외한다면야.' 대체 이 석상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하다면,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직접 읽어 보라. 이야기는 피에타를 조각한 석공 미모와 지적인 소녀 비올라와의 우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펴내는 소설마다 프랑스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2024년 공쿠르상과 프낙 소설상을 수상했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장바티스트 앙드레아는 데뷔 이래 단 네 권의 소설로 프랑스 주요 문학상 19개를 수상하며 현지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작가이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작품은 지적 장애를 앓는 사춘기 소년의 강렬한 첫사랑을 그려낸 <나의 여왕>이 국내에 먼저 소개된 적이 있고, 이번 작품이 두 번째이다. 이 작품은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밀도 높은 서사로 꽉 채우고 있는데, 이렇게 두툼하면서도 페이지가 정말 술술 잘 넘어가는 작품이었다. 마치 고전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캐릭터와 장면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눈앞에 쫙 영상으로 펼쳐지는 것만 같은 기분도 드는 그런 이야기였다. 수도원 지하에 밀폐된 비밀스러운 사연부터 왜소증을 타고난 천재 석공예가 미모와 부자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파시즘이 득세하던 당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태생적 한계와 사회적 난관에도 꺾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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