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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게 스타일을 선택하는 피카소의 능력은 하나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창조하려는 세잔의 평생 탐구와는 전혀 다르다. 피카소는 활동 기간에 수차례 스타일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신속하게 구상하고 표현될 수 있는 아이디어로부터 여러 스타일을 종횡하는 그의 예술적 면모가 발현된다는 점을 반영한다. 반면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전한 세잔이 보여준, 하나의 스타일에 대한 확고한 천착은 그의 예술의 시각적 특성의 산물이며 그 요원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30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자 했던 욕망에 사로잡혔던 위대한 예술가라면 불가피하게 자기 삶의 단계와 작품의 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젊을 때는 미래에 위대해져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기대할 것이며, 나이가 든 상태에서는 자신의 실력이 계속 향상되어온 것을 되돌아보거나, 나이 들수록 능력이 퇴보하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술가 스스로 구체적인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기에 일반성을 지닌다고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술사들의 작품의 질이 나이에 따라 어떻게 그리고 왜 다양해지는가에 대해 그들의 생애주기를 분석해보면 어떨까.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W. 갤런슨은 창의성 경제학센터의 학술 책임자로 예술적 창의성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예술가의 유형을 천재에 가까운 ‘개념적 혁신가’와 대기만성형에 가까운 ‘실험적 혁신가’로 구분했다. 실험적인 혁신을 이뤄낸 예술가들은 미적 기준을 중시하며, 시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실현하려 한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절차는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이 예술가들은 반복적으로 동일한 주제를 여러 번 다루고, 시행착오의 실험적 과정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점차 다르게 다룬다. 이들은 경력을 쌓아 나가면서 능력치를 서서히 높이고, 오랜 기간에 걸쳐 점점 더 나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이다. 반면에 개념적 혁신을 이룬 예술가들은 특정한 아이디어나 감정을 전달하려는 욕구에서 동기를 얻는다. 보통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원하는 이미지와 과정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체계적이다. 아이디어가 핵심이기 때문에 개념적 혁신은 보통 즉시 그리고 완벽하게 실행되고, 특정 목적을 달성하면 만족할 수 있다.

실험적 접근법과 개념적 접근법을 구별하는 예술가들의 인식과 관련된 다른 예시들을 추가할 수 있지만, 여기서 논의된 내용만으로도 현대의 화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들이 두 유형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두 유형의 예술가들 간 차이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방법'이 아니라 그리거나 쓰는 '이유'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해는 놀랍지 않다. 두 유형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과 이것이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미치는 크나큰 영향을 고려할 때, 예술을 연구하는 이들이 발자크, 스티븐스, 포크너를 비롯해 중요한 현대 예술가들의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p.344~345
개념적 혁신가가 단거리 주자라면, 실험적 혁신가는 마라토너다. 개념적 혁신가 대부분은 젊은 천재들로 활동 초기에 자신의 분야에서 대혁신을 불러오지만, 실험적 혁신가들은 보통 인생 후반기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나이든 거장들이다. 가장 위대한 두 명의 근대 화가인 폴 세잔과 파블로 피카소는 혁신가의 전형적인 두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세잔의 그림 그리는 과정은 항상 경험적이지만 독단적이지 않았고, 일련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연 앞에서 자신의 느낌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가는 것이었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데 따른 좌절과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할 수 있는 두려움 등 실험적 혁신가로서의 거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피카소는 예술이 예술가의 발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발견한 것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게 된 세잔과는 정반대로 피카소는 항상 다르고 예측할 수 없게 변화하는 작업 스타일을 보여줬으며, 자신의 예술에 대한 피카소의 확신 또한 세잔의 의심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식으로 방대한 수집과 연구를 토대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세잔, 잭슨 폴록, 버지니아 울프, 로버트 프로스트, 앨프리드 히치콕과 같은 예술가들이 왜 ‘실험적 혁신’을 보여준 노련한 거장이었는지, 페르메이르, 반 고흐, 피카소, 허먼 멜빌, 제임스 조이스, 실비아 플라스, 오슨 웰스 등이 왜 ‘개념적 혁신’을 보여준 젊은 천재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예술가들이 그림을 만드는 과정, 특정 그림을 그리기 전에 수행하는 것들, 작업을 시작하기 전 계획 등을 통해 예술적 혁신의 두 가지 패턴에 대해 분석하고, 동시대 화가들을 넘어 근대 이전의 화가, 근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른 예술가 그룹에 분석을 적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경제학자이기에 가능한 지점들이다. 최고가 작품 제작 시 연령, 삽화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 제작 시 연령, 회고전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작품 제작 시 연령을 비교해 주요 화가의 전성기 연령을 정리한다거나 뉴욕갤러리 첫 개인적 개최 당시 화가들의 연령 비교를 통해 실험적 예술가와 개념적 예술가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 한 눈에 보여주기도 하는 식이다. 경제학자와 예술 창의성이라니 너무 낯선 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분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연구가 경제학자만의 독특한 관점을 만들어 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숨겨진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