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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을. p.30
일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시대 희귀한 컬트적 존재이자 록스타 시인'으로 불리는 아일린 마일스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2년에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미국 대선에 출마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당시 아일린 마일스의 출마에 응답하는 헌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President〉(조이 레너드)는 삼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원문 도판과 번역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에서 제정한 윈덤캠벨문학상의 시상식 기조연설을 단행본으로 펴내는 시리즈 '나는 왜 쓰는가'의 세 번째 책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자신이 사십 년 넘도록 살아온 뉴욕의 아파트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지극히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지만, 매우 시적인 문장으로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는 '쓰기'란 삶에서 겪는 경험들을 '베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핵심은 베끼기copy다. 그는 글쓰기를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도구가 아니라, 끝없이 주문을 읊는 하나의 수행으로 지속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베끼고 그 허위를 폭로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적 구원의 길이 된다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시를 기억한다. 암송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파도처럼 돌아온다. 모두 내 뇌의 일부니까. 그것들이 내 뇌를 이룬다. 내 뇌는 안팎이 뒤집혀 있다. 시가 나를 증명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다. 일전에 시인 애덤 피츠제럴드가 망각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루이스 하이드식 이야기였던 것 같다. 망각은 잃어버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게르만적인 것, 그리고 덮이거나 덧씌워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사라지는 것에 더 가까운 그리스적인 것으로 나뉜다. p.92
이 책의 원제는 "For Now"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오랫동안 '중요한 것은 이곳에 존재하는 것, 현재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온갖 철학으로 무장해왔다. 거의 한평생 살아온 뉴욕의 집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정치적, 미학적 최전선의 글쓰기를 온몸으로 밀고나간 그의 '현재'를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이곳에 있고 싶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글을 쓰고, 읽힐수록 오롯이 하나의 사실이 되어 간다는 것. 아일린 마일스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사십 이 년째 살고 있고, 삶의 어지간한 일들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시간과 장소의 의미가, 현재와 세계가 되어 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특히나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는 말이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전한 시간 낭비로서의 글쓰기라니... 아일린 마일스의 글쓰기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어려운 단어로 쓰인 것도 아니지만, 대단히 밀도 있는 글이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어야 했다. 책 전체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그의 글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진 않지만, 삶과 문학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에 관한 아주 독창적인 시적 통찰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