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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자 선언 - 공적 슬픔과 타인의 발견
최태현 지음 / 디플롯 / 2025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타심은 사랑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최소한 그런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하나 되기의 욕망을 제어하고 그것을 거리 두기로 바꾸어낼 때, 타인을 지향하는 마음은 비로소 서로에게 작열하는 불길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저립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거리를 두어야 사랑이 완성된다니 참 슬프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입니다. 거리가 필요합니다. 세계와 우리를 이으면서도 이 둘을 구분해주는 피부가 있듯이 우리 마음에도 피부 같은 것이 있는 듯합니다. p.39~40
우리는 인간의 이타적 욕구와 선량함이 만들어 내는 다정함과 혐오와 차별, 무관심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하철 선로에 추락한 청년을 구하려고 뛰어든 행인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웃도 있다. 점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진 '각자도생'의 시대, 우리 안의 이타적 마음을 들여다보는 책이 나왔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최태현 교수는 이타심의 시작을 ‘너’가 아닌 ‘나’로 설정하기를 권한다. 그는 매번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조직을 위해 희생할 필요 없다, 자기가 지치면 결국 남에게도 해를 끼치기 때문에 자기가 지치지 않을 만큼만 희생하라'고. 이타적인 삶을 살더라도 내면의 평화를 깨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특히나 '나를 위해 사는 시간이 남을 위해 사는 시간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타인을 지향하는 마음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언젠가는 타인을 지향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시대가 만들어낸 오해의 늪에서 이타심을 건져내고 그것의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10?29 이태원 참사,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등 공적 슬픔에 적절한 그리고 충분한 애도의 과정과 태도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이타적 마음은 꼭 무언가를 ‘해주려는’ 동기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싸움을 싸웁니다. 모르도르로 향하던 프로도의 싸움처럼 도무지 도와줄 수 없는 싸움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가 나를 마지막으로 본 그 자리, 그의 눈에 죽음의 그림자가 임박했을 때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싶어 눈길을 돌려 바라볼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그가 언제라도 전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충분히 깊어진 이타심은 무언가를 억지로 하는 마음보다는 그저 소나무처럼 그 자리에 있어주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p.221
이타심에 대해 말할 때면 자주 소환되는 일화가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기차를 타다가 한쪽 신발이 벗겨져 밖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기차 안에서 나머지 한쪽 신발을 창밖으로 던진다. 누군가 이유를 묻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쪽 신발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차피 이 신발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어졌고, 밖에서 신발을 주운 사람에게도 한쪽만 있으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한쪽 신발도 던지면 최소한 주운 사람은 제대로 된 신발을 신을 수 있을 거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간디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한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자신에게 필요없는 신발을 던졌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행동이므로 자신의 명성을 드높일 거라 계산했을 수도 있으니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인 것일까? 마찬가지로 거액을 기부한 유명 연예인, 처치 곤란했던 물건을 무료로 나눠주는 사람, 사정이 어려운 가게를 '돈쭐'내고 SNS에 인증하는 사람.... 이들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
사람들은 흔히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구분하지만, 사실 딱 잘라서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을 구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이기주의라는 바다와 이타주의라는 육지가 만나는 갯벌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우리의 행동 이면에는 복잡한 동기들이 있으며, 우리는 단순히 딱 잘라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여러 마음이 얽혀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타적 마음에 대해 사유하는 이 책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개인의 삶이 도대체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어디서 나아갈 수 있는지, 어디서 멈추게 되는지 질문하고 답을 구해나가는 과정은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해보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타심은 타고난 마음으로만 영글지 않는다고, 공부를 통해 길러진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타심은 타인을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의 시간과 땀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결국 '선택'하는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며 '타인을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