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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곁에 머물기 - 지구 끝에서 찾은 내일
신진화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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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은 냉동고에서 샘플을 자르는 일로 열었다. 자르기 전 빙하 시료를 매만지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샘플이 지금으로부터 19만 년 전에 만들어졌구나, 14만 년 전에 만들어진 빙하였구나 하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지구를 상상하며 과거를 여행했다. 찰나의 시간 여행을 마친 후 냉동고에서 샘플의 모든 표면을 1센티미터 정도로 잘라 오염된 부분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과거 대기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 샘플을 자르고 재빨리 코를 가져다 대기도 했다. p.72~73
지구과학의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빙하로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 '빙하학'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유일한 여성 빙하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빙하는 눈이 내리는 당시의 기후와 환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후 유언장 같은 존재이다. 만들어진 당시의 대기가 보관되어 있는 빙하에 대해 빙하학자들은 '냉동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빙하를 이용하면 대기의 상태, 화산활동과 같은 과거 기후와 환경 자료를 복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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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역 빙하를 활용하면 약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긴 역사 중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가장 유사한 지난 80만 년의 연속적인 기후 데이터를 복원할 수 있어 지구를 진단하고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빙하학자들은 남극대륙, 그린란드 등 두툼한 빙하가 뒤덮고 있는 극한의 환경에 가서 오염되지 않은 시료를 채취한다. 인간의 접근이 제한된 곳까지 들어가볼 수 있다는 점은 커다란 매력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둔 빙하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빙하학자들은 지질학자가 지층에 새겨진 역사를 읽듯이 수십만 년 전에 생성된 빙하의 층서를 읽는다. 그렇게 누적된 단서들을 조합해 당대 기후 사건을 해석하고 지구 역사를 파헤친다. 그리고 이는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에도 주요한 기초 자료로 쓰인다. 저자는 녹아서 층서가 뒤죽박죽 섞인 빙하를 연구하다가 심전도 모니터의 일직선이 그어지는 듯한 위기를 감지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제외되거나 아시아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모욕적인 일을 겪기도 하며 쉽지 않은 여성 빙하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현장 경험 없이는 탁상공론에 그치기 쉬워 악착같이 현장을 자청한다. 그렇게 2012년부터 지금까지 빙하만 연구했고 2023년 6월에는 그린란드 국제 심부 빙하 시추 프로젝트에 국가대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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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린란드 빙하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 생을 마감하는 빙하를 직접 보고야 말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한다면 그린란드 빙하는 더 빠르게 후퇴할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빙하가 얼마나 급속도로 녹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빙상을 감상하고 있는 참여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두 조용히 깨진 빙상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빙상의 후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신기함과 기후변화의 흔적을 직접 목격했다는 공포감이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감정에 사로잡힌 채 우리는 다시 임시 캠프로 돌아갔다. p.142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점점 녹아서 북극곰들이 먹이를 구할 데가 없어지고 있다. 작은 빙하 위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북극곰의 모습은 환경 다큐멘터리, 동화책 등으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 생태계 환경이 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생물들이 멸종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은 사람들이고, 결국 그 영향은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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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지구과학 영역에서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준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의미있는 책이었다. 이미 전 세계의 많은 빙하가 녹기 시작했고, 기후변화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각지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80만 년을 기억하는 남극 빙하 코어는 기후위기 시대의 책임자로 빙하는 인류를 지목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면 언젠가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의 인류처럼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급격한 속도로 배출했던 존재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2100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800피피엠을 웃돌 것이고 그 수치는 3390만 년 전 그린란드에 빙하가 없었던 때와 맞먹는다. 그야말로 지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기후 회의론자들은 지구의 수십억 년 역사를 들먹이며 지구란 원래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했다며 지금은 다섯 번째 빙하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기후휘기란 별거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가 매년 체감하는 기록적인 폭염과 이상기후에 따른 징조, 재난의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빙하학자의 시선으로, 더 치밀하고 적확한 분석과 현장에서 밝혀낸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빙하학'을 통해 우리의 지구를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