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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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교술이란 결국 일종의 독심술이며, 나를 맞아준 부인에게는 그 귀한 재능이 있었다. 공감은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고, 블래킷 부인과 내 세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하나였다. 게다가 부인에게는 궁극의 재능, 천상이 허락하는 가장 고매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완전한 이타였다. 때때로 부인의 다정하고 열심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찌 된 사연으로 이토록 빛나는 인물이 북쪽 바다의 외딴섬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의아해졌다. 어쩌면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일지도, 각자 흩어져 살지만 서로가 절실한 이웃들에게 부족한 것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일지도 몰랐다.                    p.75



'나'는 짧은 첫 방문과 뱃놀이 길에 둘렸던 두세 해 여름을 뒤로하고 다시 더닛 랜딩을 찾았다. 여름 한 계절을 지낼 숙소로 거리 끝에 위치한데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 있어 번잡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채로 아늑해 보이는 앨미라 토드 부인의 아담한 집을 선택한다. 하지만 조용히 은둔하며 글쓰기를 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결코 은둔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초 애호가인 하숙집 주인 토드 부인의 세심한 환대 덕분이다. 토드 부인은 정원에 있는 약초밭에서 제배하는 풀들을 끓여 몸이 아픈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마을 의사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약초 채집이 제철을 맞은 6월 말에 도착했기에, 토드 부인이 화창한 날마다 숙박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토드 부인과 산책하며 지혜를 전수받고, 그녀의 일을 도와주느라 7월이 훌쩍 지났는데, 그러다 보니 마감이 지나버렸으나 꼭 써야만 하는 긴 글을 떠올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토드 부인에게 당분간은 방에 틀어박혀 일에 전념해야겠다며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웃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늙은 선장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주고, 만 건너편에 있는 토드 부인의 엄마를 함께 만나러 가기도 한다. 그렇게 더닛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그들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동안 여름 한철이 천천히 지나간다. 토드 부인은 그 이웃들과 함께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저마다 고생을 잔뜩 하고 그 고생의 명암을 전부 깨우칠 때까지' 함께 해왔다. '나'는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서로에게 한 시절을 온전히 내어주는 이들의 삶을 함께 체험한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한껏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게 누구든 마음이 좋아지는 것 같아."라는 극중 토드 부인의 말처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삶들이 그런 느낌이었다. 유쾌하고, 용감하고, 애틋하고, 따스하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평범한 일상의 세계 말이다. 




그곳에 속세가 있었고, 이곳에 능히 시작된 영원을 사는 조애나가 있었다. 우리 모두의 생에는 외따로이 고립된 장소가 있다고, 끝없는 후회와 비밀스러운 행복에 바쳐진 장소가 있다고, 우리 모두가 한 시간이나 하루쯤은 동행 없는 은둔자이며 외톨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역사의 어느 시대에 속했든 우리는 이 똑같은 감옥의 수감자들을 이해하고 만다고도. 산들산들 바닷바람이 부는 셸히프 아일랜드에 홀로 서 있는데, 문득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바다 쪽으로 향하는 유람선을 가득 채운 젊은 남녀의 쾌활한 말소리와 웃음소리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p.126~127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지만, 강추위는 여전한 요즘이다.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추운 계절에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세라 온 주잇의 <뾰족한 전나무의 땅>이다. 주잇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가까운 여성들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특히 보스턴에서 문학 살롱을 개최하던 애니 필즈와 각별했다. 두 사람은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집필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알려졌다. “자기 공간을 향한 나의 애착은 야옹, 하고 운 적 있는 그 어떤 고양이보다도 강하답니다”라고 스스로 묘사한 것처럼 주잇은 미국 지방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자신의 공간에 깊이 속한 존재였다. 이 작품 속 바닷가 풍경은 첫 장편인 <디프헤이븐>과 마찬가지로, 북동부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 사우스버윅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은 그가 평생 발붙이고 사랑한 땅이었다. 공간에 대한 애착 덕분인지, 작품 속 공간에 대한 묘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마을과 사람,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묘사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1896년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은 '여성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여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당시의 시대상에 맞는 종속적인 여성 대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간 다 잡아먹을 남자들'과 함께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한껏 사랑해온 마음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즐거움과 포근한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하다. 6월에 시작되어 8월의 늦여름까지 이어지는 시기가 작품의 배경이라 페이지마다 여름의 빛과 공기가 흠뻑 느껴지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깥은 겨울이었지만, 나는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의 초록빛 풍경 속에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들바람, 따사롭고 청량한 공기, 햇살 아래 나무 향기를 느끼며 단호한 마음으로 꽃송이와 명랑함을 심은 아담한 정원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잔잔하게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처럼 섬세하고, 사려 깊게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가 마음의 온도를 조금씩 데워주었다. '세라 온 주잇'이라는 반짝이는 작가를 발견하게 해주어 너무도 고마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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