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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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선원들이 무릎을 꿇은 채,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모아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 같은 것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다가는 마을에 재앙이 닥칠 것이야. 우리 선조들은 이들을 때려죽이기로 결정하셨고, 마을은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어. 마을의 관례는 반드시 지켜야 해."

어머니의 눈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이사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p.125



곧 열한 살이 되는 이사쿠가 사는 마을은 지형 특성상 고립되어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열일곱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어촌 마을에는 변변찮은 일거리가 없어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다른 마을로 가려면 북쪽에 있는 바위가 많고 험준한 산을 넘어 가야 했고,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생선 따위를 농작물과 맞바꾸어왔지만, 가족들의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부분 가족 중 한 사람이 산 너머 마을의 고용 하인으로 가곤 했는데, 계약의 대가로 목돈을 받게 되면 그걸로 가족들이 먹을 곡식을 샀다. 이사쿠의 아버지도 3년 계약으로 은 60돈을 받았는데, 마을에서도 눈에 띄게 건장한 데다 배를 모는 데도 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은을 받은 편이었다. 


이 마을에는 단풍이 물들 무렵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바로 뱃님을 위한 의식이다.  뱃님이란 마을 앞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 좌초한 배를 말한다. 뱃님에는 보통 음식, 집기, 기호품, 천 등이 잔뜩 실려 있고, 이 물건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충분히 윤택하게 해준다. 또한 파선의 목재는 집을 수리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겨울을 앞두고 열리는 마을 의식은 항해하는 배가 암초에 좌초되어 부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게다가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해변으로 유인하기 위해 야간에만 소금을 굽는다. 거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배의 경우 소금 굽는 불을 보고 마을이 있는 해변이라고 생각하고 배를 해안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배가 마을 앞바다를 지나가면 배 밑바닥이 암초에 걸려 금세 부서져버리고 만다. 난파된 배를 기원하는 의식을 넘어 배의 난파를 유도하는 방법까지 써야 할 정도로 이 마을 사람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뱃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어촌 마을의 기괴한 풍습은 결국 잔혹한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데...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마을 남자들 대부분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오기는 했으나 예년과는 조금 달랐다. 고기를 잡으려면 새벽에 나가는 게 보통인데 바다에 햇살이 가득한 시간이 되어서야 나오는 이도 있었다. 고기잡이를 마치는 시간도 빨라져서 해가 기울 무렵에 뭍으로 향하는 배가 많았다. 몸이 아프다며 아예 바다에 나오지 않는 남자도 있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무서운 일은 마음이 해이해지는 것이야."

어머니는 화롯불에 장작을 넣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게을러진 사람들은 뱃님이 가져다준 식량 덕에 마음이 느긋해져 고기를 잡으려는 열망이 시든 것이 분명했다.               p.156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는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라 불린다. 일본에서 조선인 6,000여 명이 일본 자경단에게 집단으로 살해당한 조선인 대학살을 다루는가 하면, 소설임에도 철저한 취재와 고증을 바탕으로,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이번에 나온 <파선>은 198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감염병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일본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소위 ‘역주행’으로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작품이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어둠 속의 불>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되었는데,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읽는 내내 영상화하면 정말 흡입력 있는 호러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영화 버전도 상당히 궁금해진다. 주도 면밀한 취재와 현장 증언 사료를 기반으로 치밀하게 구성하며 쓰는 작가의 스타일 덕분인지, 실제로 어느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생생한 현실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고립된 마을과 그 속의 기괴한 풍습, 소금을 굽는 불로 항해하는 배의 난파를 유도한다는 사실은 타인을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된다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끔찍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이 배의 물품을 약탈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는 선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때려죽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선 오싹한 공포심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관례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광기와도 같은 분위기가 시종일관 서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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