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식당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집의 대표 메뉴인 비프 카레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방금 산 <오토기조시>를 펼쳐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번역한 <삼인법사>를 읽는다. 헌책을 사서 카레집이나 카페에 들어가 책을 펼칠 때의 즐거움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삼인법사>에는 다니자키의 서문이 실려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설프고 유치하지만 구성이 훌륭하고 애수를 띠고 있어 좋다는 내용이다. 읽기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p.86


<낮술>, <호로요이의 시간>, <우선 이것부터 먹고>, <할머니와 나의 3천 엔>, <도서관의 야식>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하라다 히카의 신작이다. 음식에 대한 묘사를 잘하는 걸로도 유명한 하라다 히카는 소설을 통해서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을 만끽하게 해줘서 참 좋아한다. 지킴이 일을 하는 삼십대 여성이 하루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점심에 맛있는 음식과 거기에 어울리는 술 한 잔을 곁들이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그렸던 작품 <낮술> 시리즈 3권을 읽고 반해 버려서 이후 하라다 히카의 작품들은 무조건 챙겨보는 중이다. 밤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야식이라는 설정의 <도서관의 야식>도 책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실제로 만들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먹는다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줘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신작에서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도쿄 진보초에 자리한 작은 서점 ‘다카시마 헌책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갑작스러운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도쿄 진보초 거리의 헌책방 주인이 된 60대 할머니와 작은 할아버지의 헌책방을 종종 찾았던 고전문학 전공의 대학원생, 두 사람이 헌책방을 함께 운영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따뜻하게 펼쳐진다. 


평생 홋카이도에서 살았던 산고 할머니는 평소 책을 읽는 건 좋아했지만, 장사 경험도 없고 도쿄에서의 생활도 낯설기만 하고, 고모 할머니를 걱정하는 엄마의 부탁으로 헌책방을 드나들게 된 미키키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왜 작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책방을 맡기지 않았을까 서운해한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책방 위층의 출판사, 옆집의 철도 전문 서점, 블렌딩 커피를 파는 카페의 사람들과 책방을 찾는 다양한 사연의 손님들 이야기가 어우러져 맛깔스럽게 잘 차려진 한상 차림의 음식처럼 다정하게 읽는 이를 위로해준다. 삼백 년도 더 된 가게에서 파는 초밥과 향이 진한 짙은 갈색의 비프 카레, 바삭하게 튀겨져 고소한 러시아의 빵 피로시키, 감칠맛과 풍미가 깊은 야키소바 등 하라다 히카가 페이지 위에 재현해내는 음식들은 그 맛과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다. 




"현재 제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건 당신 같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제가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웃는, 눈곱만큼도 웃기지 않은 것에 웃는 당신 같은 사람이요."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분하다.

"적어도 저한테 없는 걸 갖고 계신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저는 그 센스를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만해! 반복하지 말라고.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기가 괴로워 물었다.

"저한테 재미있는 책을 알려주시겠어요?"            p.216



이 작품의 배경인 진보초는 사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마을과도 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책 마을이자, 세계 최고의 책 거리라 불릴 만한 서점 수와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서점 한 곳 한 곳이 거대한 서가가 되고, 골목길은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애서가들의 천국이다. 오래된 책들을 진열하고 있는 헌책방들은 비슷해보이면서도 제각각 다르다. 가게의 규모, 책장의 진열 방식이나 조명에 따라 분위기도 다르고, 무엇보다 어떤 책을 선별해서 진열했느냐에 따라 헌책방의 얼굴도 완전히 달라진다.


한때 빼곡히 진열된 헌책들의 거리, 부산에 있는 보수동 책방 거리를 꽤나 자주 다녔었기에 진보초는 가보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된다. 오래전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나, 작가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 혹은 갖고 싶었던 책의 초판본 등 헌책방에서만 구할 수 있는 책들의 세계는 애서가들이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리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 책, 인기가 없고 오래된 책들을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기도 하다. 읽고 싶었던 책을 그렇게 구하게 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선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책은 그렇게 헌책방을 자주 다니던 시절의 향수도 되찾게 해주었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 때문이기도 하다. 산고 할머니와 미키키는 책방을 운영하면서 교대로 나가 점심을 사 먹고 오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와서 끼니를 해결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책을 추천해주거나, 찾는 책을 찾아주는 등 대화를 하다가 자신들의 음식을 함께 먹자고 권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초밥집의 게누키스시(조릿대 잎으로 감싼 초밥), 진보초 거리 최고의 비프 카레, 어린이책 전문 북카페에서 파는 따끈파삭한 카레빵, 튀긴 면에 소스를 부어 먹는 방식의 야키소바 등 책에 그림이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치 눈 앞에서 그들이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묘사에 배가 고파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사실 음식을 먹으면서 책을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카페에 가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을 때 책을 함께 하긴 하지만, 혹시나 책에 얼룩이 묻거나 할까봐 그것도 얼른 먹고 나서 책을 펼쳤으니 말이다. 그러니 밥이나 식사가 되는 음식을 먹으면서 책을 읽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헌책이라면 음식을 먹으면서 독서를 하더라도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극중 미키키가 헌책을 잔뜩 취급하는 가게에서 음식을 낸다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는데, 책에 가득 둘러싸인 채로 먹는 음식의 맛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여전히 새책을 보면서 음식을 먹는 것은 반대지만, 헌책방과 음식은 꽤나 잘 어울릴 것 같다. 이렇게 음식과 사람, 그리고 헌책방의 소소한 일상들부터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서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디테일이 가득한 이야기라 책과 서점을 좋아하는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어딘가에 이런 서점이 있다면, 매일 찾아가고 싶어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