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없는 밤
서한나 외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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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은 사이의 공간이다. 밤은 세계가 벌이는 까꿍 놀이, 세계와 인식의 좁힐 수 없는 간극, 세계고의 원천이다. 악마들은 이곳에서 암약하며 취약한 영혼을 노린다... 세계가 부재하는 밤의 공간, 불확정성의 공간, 그 미정의 공간을 우리 자아의 창조물로 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공간을 장악하면 수동성의 모멸감이 사라지고 드디어 의도성의 세계가 열린다. 생애 서사를 주도적으로 다시 쓰는 일이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인 이유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른이 된다.               p.57~58


무엇이든 실제보다 좋게 느껴지게 만드는 술의 거짓말은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유효기간이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무언가를 잊어 버리기 위해,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대와 친해지기 위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후기 위해 술을 마신다. 이 책은 작가, 번역가, 싱어송라이터, 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6인이 통과한 술 없는 밤을 그리고 있다. 술을 즐기는 이도 있고, 그저 취한 사람들과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고,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밤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들은 매일 당연하게 찾아드는 그 시간을 술이 있거나 없는 상태로 보낸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마시지 않는다. 처음 봤을 때 호감을 갖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타입의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단 한 명의 인간이 되기도 하고, 술은 한 잔도 먹지 않는 나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는 이들에게 거절을 늘어 놓기도 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자리에 있는 것을 좋아해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술이 없어 불안이 증폭되기도 하고, 술에 취해 맨정신을 챙기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술 있는 밤이 구체적일수록 술 없는 밤의 형체는 모호하게만 느껴지는데, 이 책은 바로 그 모호함과 구체성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관계의 진정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쌓아갈 수 있을까. 그 순도를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마법으로도 돈으로도 할 수 없다(되는 듯 사실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술을 택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택한다. 그건 마치 흑마술 같다. 이 신비한 음료를 너와 내가 같이 마시면 우리의 관계에는 진정성이 생겨난단다. 우리는 덜 어색해지고, 우리는 속 얘기를 더하게 되고, 우리는 친밀감을 더 느끼게 될 것이란다. 하지만 흑마술에는 대가가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게 일어났던 비극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p.139~140


개인적으로는 수록된 글 중에 문학평론가 김선형의 작품이 매우 아름답고 유독 인상깊었다. 유달리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였던 유년의 밤들이 춥고 막막하고 헛것들로 가득했는데, 책이 구명줄인 양 매달리며 헛것들을 쫓다 지쳐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자신과 세계 사이의 인식의 괴리를 잊기 위해 술로 도망친 수많은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매혹적인 밤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밤이 내리면 세계는 소망과 두려움의 영역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꾸며낸 이야기가 난무하며 문명과 야만의 거점은 안팎의 경계를 무화한다'고 썼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밤을 감당할 자원을 제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정량의 광기를 외부에서 조달해 혈류에 주입해야 한다'고 말이다. 햄릿과 보르헤스, 스티븐 킹,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그리고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사유하면서 그렇게 밤의 시간이 시처럼 펼쳐진다. '밤에 걸쳐진 환상의 베일, 불안을 벗어던진 향연의 약속, 불투명한 지금 여기를 견디'게 해주는 글이었다. 책 자체가 판형이 작고, 굉장히 짧은 문량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유독 짧아서 아쉬웠던 작품이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취한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오지은 작가의 글도 어딘가 사랑스러운 면이 있었다. '주책맞고, 다정하고, 잘 웃고, 굳이 한마디 더 하고, 농담을 4절까지 잇고, 누군가를 더 잘 좋아하게 되고, 할까 말까 고민되는 행동은 그냥 해버리는 사람들', 그러니까 주정뱅이들과 친해졌기 때문에, 술자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글이었으니 말이다. 술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도 술 있는 밤을 이렇게 좋아할 수도 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타인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에 담긴 온기가 참 좋았던 작품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분량이 작아서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몇몇 글들은 이렇게 여러 번 읽고 싶고, 또 읽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자, 이 책과 함께 권태와 고독, 불안 그리고 해방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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