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색환시행
온다 리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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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를 겹겹이 쌓아 올림으로써 작품에 얽힌 전설과 '저주'의 효력을 견고하게 하는 <밤이 끝나는 곳>.

역시 끌린다.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꺼림칙한 것에 홀리고 불길한 것에 끌려가는 법이다.                p.75


사람들 사이에서 ‘저주받은 작품’으로 알려진 소설이 있다. <밤이 끝나는 곳>이라는 소설을 영상으로 제작하려고 하면 재앙과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몇 년에 한 번은 이 작품을 영상화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세트장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생겨 배우와 스태프들이 사망하는 대참사를 시작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한 각본가가 그 직후에 자살하는 바람에 제작이 엎어진 경우도 있었고, 배우가 다른 배우를 죽이고 자살하는 일이 벌어져 촬영이 중단된 경우도 있었으며, 화재 장면을 찍고 있을 때 카메라맨이 급사한 경우도 있었으니, 정말 작품에 누군가 저주라도 내린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밤이 끝나는 곳>은 베일에 싸인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곽 '추월장'에서 세 명의 엄마와 살았던 '나'의 회상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기묘한 분위기의 환상 소설이다. 세 명의 엄마는 엄마이면서 엄마가 아니다. 낳아준 엄마는 종일 꼼짝 않고 앉아서 새장만 바라보고 있고, 호적상 엄마는 무표정으로 여관 카운터를 보고 있으며, 공부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치며 실질적으로 키워준 엄마가 있다. 낳아준 엄마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의사소통이 불가하고, 키워준 엄마도 어딘가 비뚤어져 있어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고, 표면상의 엄마는 체면치레를 하기 위한 행동밖에 하지 않는다. '손님에게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눈으로 본 것을 스케치하는 법을 배웠고, 그때부터 종종 본 것을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시초가 되고 만다. 유혈이 낭자하고 섬뜩하지만 어딘가 마음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둔색환시행>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 또한 사로잡는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멈출 수는 없었을까. 피할 수는 없었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뉴스를 보고 안타까워서 의문이 들어.

하지만 본인들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을 테지.

피할 수 없어. 벗어날 수도 없어.

누군가 수건을 던져주는 사람이 없는 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어코 그곳에 다다르는 수밖에 없네. 그런 상황도 확실히 존재하지.

그 두 사람도 그런 걸 봐버린 게 아닐까.

그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은 마에 홀려버린 게 아닐까.           p.482


《둔색환시행》은 온다 리쿠가 “일본에는 영화감독들이 욕심내지만 막상 판권을 사고 작업에 들어가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게 되는 저주에 걸린 소설이 있다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쓰게 된 소설로 무려 15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이 설정에 맞추어 작품 속의 작품 개념으로 짝을 이뤄 쓰인 소설 《밤이 끝나는 곳》도 함께 출간되었다. 리버시블 커버에 작가 이름을 메시아이 아즈사라고 표기한 것까지 실제하는 작품처럼 완벽하게 만들었다. 《밤이 끝나는 곳》은 288페이지, 《둔색환시행》은 652페이지이다. 먼저 저주 받은 소설인 《밤이 끝나는 곳》을 읽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여정을 담은 《둔색환시행》을 읽은 다음, 다시 《밤이 끝나는 곳》을 읽으면 더 재미있다고 해서 <밤이 끝나는 곳>을 먼저 읽어 보았다. 하지만 <둔색환시행> 중간 중간 <밤이 끝나는 곳>의 본문 일부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꼭 먼저 읽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다. 


소설가인 주인공 고즈에는 변호사인 남편의 소개로 <밤이 끝나는 곳>의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2주간의 크루즈 여행에 참석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는데, 남편의 전처가 해당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자살한 작가였다. 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은 열 명 정도로 몇몇은 친척, 혈연관계였고, 모두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이다. 영화감독, 여배우, 프로듀서, 영화 평론가, 출판 편집자, 만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소설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집착으로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고즈에는 관계자들을 취재해 일종의 논픽션을 쓸 생각인데, 그들을 통해 소설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작품을 둘러싼 새로운 해석을 비롯해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사고들, 그리고 딱 한 작품만 발표하고 사라져버린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이 작품의 제목인 <둔색환시행>은 모호함의 세계와 크루즈 여행의 검은 바다를 상징하는 둔색(鈍色), 그리고 선상 밀실 미스터리를 향한 환시행(幻視行)이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온다리쿠는 ‘둔색’이라는 말은 그 애매함을 나타내려고 만들었다며, '애매함을 견디는' 것이 어른이 갖춰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아무리 마음이 불편해도 아무도 도망갈 수 없는 완벽한 밀실인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거짓말의 탑 위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여정이자,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창작자로서의 철학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메타픽션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의 새로운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 보시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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