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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게 정묘했다. 어떻게 이런 필치가 가능할까... 이런 작품, 나라면 평생 걸릴지도 모른다. 뭔가 찰나의 덧없음이 있다. 가령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다면 실로 한순간일 터인데, 그 한순간이 이렇듯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훌륭하게 그리려는 생각도, 사실적으로 옮기려는 의도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다 찍은 사진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방에 걸어봤어, 하고 말하는 듯한, 내일 다시 찾아오면 그림은 사라지고 벽만 남아 있을 것 같은, 불안정한, 순간의 흔들림 같은 무언가가 그림을 숨 쉬게 했다. 나는 불가해한 매력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p.37
카논은 미술을 전공했지만 자신의 그림 재능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광고 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엉뚱한 요구를 해대는 상사와 불륜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자 그만 질려서 퇴사를 하게 된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가게 되지만, 기획이 채택될 때까지는 딱히 보수가 있는 게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화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을 취재하며 잊고 있었던 그림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특집기사 작업을 맡게 되는데, 뱅크시처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화제의 작가에 대한 심층 탐구 기획이었다.
얼굴도 이력도 공개하지 않는 수수께끼의 화가가 있다. 그가 그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가 떠돌아 ‘사신’이라 불리며 도시전설의 주인공처럼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작품이 죽음을 테마로 하고 있고, 임종 직전의 인물을 그리거나 해부중인 인체를 모티프로 한 작품도 있었다. 그가 그린 작품의 모델들은 전부 이미 세상에 없다. 게다가 그에게는 인터넷상의 가십 따위는 깨끗이 잊게 만드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오라가 있어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천재 복면 화가의 이야기를 쫓는 아트 미스터리이다. <러브레터>의 감독 이와이 슌지는 소설가로서도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는데, 이번 작품으로 첫 미스터리 소설에 도전했다. 수습기자인 카논은 본명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복면 화가의 정체를 추적하게 되면서 점점 더 그의 작품과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모습은 닮기 어렵고 뜻은 닮기 쉬우니."
"그게 뭐예요?" 가세가 물었다.
"다카나시 씨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 마음을 흉내 내기는 쉽지만 형상을 흉내 내는 일이야말로 어렵다는 뜻이래. 어떻게 생각해?"
가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마음과 형상을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잘 넘기기는. 분명 그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리라....... 아마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잘 모르지만. p.377
카논은 고교 미술부 후배였던 가세를 취재 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천재 복면 화가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도 종종 동행하게 되는데, 어느 날 가세가 이런 말을 한다. "뭔가 그, 언뜻 현실 세계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저 망상이나 꿈 같은 그것들이 의외로 현실에 이리저리 개입해서 때로 이 세계를 바꿔버리는 일도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요."라고.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실은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계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영 알쏭달쏭한 이 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일순간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그림 작품처럼, 뭔가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에 새겨지는 게 있는 그런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저주를 그리는 사신이라는 금단의 도시전설을 따라가는 미스터리 서사 자체도 흥미진진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적인 부분도 어딘가 설레는 부분이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와락 전해지는 그런 그림과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이와이 슌지는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순식간에 매혹시키곤 하는데, 그런 감각을 소설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에서 이 작품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소설을 집필하는 데 모티프가 된 미에노 케이의 하이퍼리얼리즘 회화가 표지 이미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큰 도움을 주는 그림이었다. 이와이 슌지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면모와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 작품을 더욱 독특한 미스터리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와이 슌지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여러모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색다른 미스터리 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와이 슌지의 작품들을 좋아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